“1840년대 어느 날 프랑스 양초제조협회가 의회에 다음과 같은 내용의 애절한 청원서를 제출했다. ‘우리 양초제조업자들은 값싸고 질 좋은 조명기구를 만드는 외국 업자와 불공정 경쟁을 해 막대한 손실을 보고 있습니다. 그 업자는 다름 아닌 태양입니다. 프랑스 경제를 위해서는 양초산업을 살려야 합니다. 창문, 채광창, 덧문 등 햇빛이 통하는 모든 통로와 틈을 폐쇄할 것을 명하는 법률을 제정하기를 간절히 요청합니다.’”

이 청원은 실제로 일어났던 일이 아니라 여러 가지 그럴듯한 이유를 들어 보호주의가 극성을 부리던 19세기 프랑스의 정치적 상황에 대한 신랄한 풍자였다. 이를 쓴 주인공이 프랑스 경제평론가 겸 경제 사상가인 프레데릭 바스티아(Frederic Bastiat)다. 그는 ‘19세기 가장 위대한 경제자유의 챔피언’이었다.

상인 집안에서 태어나 어린 나이에 부모를 잃고 할아버지 슬하에서 자란 바스티아는 대학을 중퇴하고 가업을 이어갔다. 기업들이 잇따라 문을 닫고 실업이 늘어나는 등 보호주의가 불러오는 참혹한 현실을 경험했다. 정부 간섭을 막기 위한 지적 운동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낀 그는 언젠가는 경제학을 공부해 경제사상가가 되겠다고 다짐했다.

25세 때 할아버지로부터 농장을 물려받은 바스티아는 부농(富農)이 됐다. 꿈을 실현할 절호의 기회였다. 경영을 다른 사람에게 맡기고 경제 연구에 몰입했다. 독서광이었던 그는 자유의 철학에 대한 내공을 쌓아갔다. 40대 초반부터 자신의 사상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바스티아의 최대 관심은 정부의 자의적인 권력행사를 억제해 경제자유를 보호하기 위한 논리 개발이었다. 그게 다른 사람들의 권리를 침해하지 않는 한 누구나 자신의 이익을 추구할 기본권이 있다는 권리이론이다. 정부의 과제는 생명, 자유, 재산에 대한 타고난 권리를 보호하는 것이라는 게 그의 설명이다.

흥미로운 것은 바스티아의 법경제학 사상이다. 법은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위해 디자인된 것도 아니요, 의회에서 다수의 지지를 받았다고 해서 모두 법으로 볼 수도 없다고 주장한다. 그는 법의 원천을 인성에 두었다. 인간은 본래 생존번창하기 위해 생각하고 평가해 자신의 목적을 추구하는 존재라는 것이다. 그래서 인간에게 필요한 것은 자유와 재산에 대한 권리라고 한다. 이 권리를 보호하는 것이 법의 기능이라는 게 그의 논리다.

그런 법질서를 기반으로 하는 자유 시장에서 누구든 자기 이웃은 적이 아니라 파트너라고 바스티아는 설명한다. 자본은 노동의 적이 아니라 친구라는 얘기다. 자본축적은 노동 생산성과 소득을 증대시켜 노동자를 부유하게 만든다는 이유에서다. 질 좋고 값싼 상품의 공급을 가능하게 해 실질 임금을 늘리는 것도 자본축적이라고 말한다. 따라서 자본시장을 박해하면 자본만이 아니라 노동도 피곤해진다는 그의 인식은 주목할 만하다.

모든 경제현상을 소비자 편에서 판단해야 한다는 바스티아의 인식도 탁월하다. 사업이 성공하려면 소비자의 욕구에 충실해야 하고 자본이 소비자를 위해 사용되지 않으면 그것을 축적할 수 없다는 이유에서다. 그는 경제를 보는 시각을 생산에서 소비로 바꾼 최초의 인물이다.

바스티아의 뛰어난 통찰력은 시장경제를 자원배분 대신 서로 다른 이해관계들의 조정과정으로 이해하는 데서 두드러진다. 자본과 노동, 지주와 소작, 생산과 소비 등 서로 충돌하는 다양한 이해관계들을 평화롭게 조율해 자생적으로 ‘사회통합’을 실현하는 게 자유시장이라는 지적이다.

자유무역이 번영을 가져온다는 그의 주장도 돋보인다. 무역의 자유가 많은 나라일수록 빈곤층이 작아진다는 미국 싱크탱크 헤리티지재단의 통계적 연구가 이를 입증한다. 전쟁의 주요 원인은 보호주의 탓이었다는 그의 역사인식도 흥미롭다. 따라서 제2차 대전 후 전대미문의 장기간 동안 세계평화가 유지된 것은 자유무역 때문이라는 해석도 가능하다.

그러나 정부를 바라보는 그의 시각은 매우 비관적이다. 조직된 집단의 이해관계에 의해 쉽게 이용당한다는 이유에서다. 경쟁을 제한하고 타인의 희생을 요구하는 의회의 입법이 범람하는 것도 그 때문이라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그런 입법은 자유와 재산권을 침해하고 타인들의 정당한 이익을 ‘약탈’하는 것을 합법화한다고 개탄한다.

흥미로운 것은 그 같은 입법의 결과다. 옳고 그름의 구분을 흐리게 해 도덕을 붕괴시키고 사회를 혼란스럽게 한다고 바스티아는 주장한다. 생산과 공급은 줄어들고 실업이 늘어나는 것은 ‘약탈적’ 입법의 치명적 결과라는 그의 주장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정부는 누구나 다른 사람을 희생해서 살아가기 위해 이용하는 거대한 조직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정부는 사회통합의 원천이 아니라 사회갈등의 원천이라는 바스티아의 인식은 이채롭다.

이와 같이 바스티아는 권리이론, 조화이론을 개발해 재산권과 시장경제에 대한 새로운 인식 틀을 제공했고 간섭주의 이론을 개발, 정부간섭의 근본적 문제를 파헤쳤다. 그래서 그는 경제자유의 챔피언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바스티아 사상의 힘- 오스트리아학파 선구자…유럽시장 개방에 영향

바스티아의 자유주의 사상은 프랑스가 높은 관세와 보조금으로 자국 기업을 보호하고, 각종 규제를 통해 국가 목표를 달성하려는 간섭주의와 자본가의 경제적 이득은 노동자 희생의 대가라고 주장하는 사회주의가 득세하던 시기에 태어났다. 자유주의와 시장경제에 대한 반대 여론이 지배하던 시절의 산물이다.

겉으론 사랑과 평화를 변호하면서 속으론 증오와 전쟁을 부추기는 것이 사회주의라고 그는 설파했다. 의회 대표자들은 자유와 재산을 보호하기보다는 한 편의 시민을 위해 다른 편의 시민을 희생시킨다고 민주주의 병폐도 꼬집었다. 그의 비판이 옳았다는 것은 3분의 2가 재분배를 목적으로 하는 20세기 서구 사회의 예산이 입증한다.

바스티아의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의 원리는 간섭주의와 싸우기 위한 중요한 이론적 무기다. 어떤 정책이든 눈에 보이는 효과와 눈에 보이지 않는 효과가 있는데, 정책을 만들 때 눈에 잘 보이는 효과에만 집착하고 눈에 잘 띄지 않는 것은 무시해 해로운 정책들만 선택하는 게 간섭주의라는 얘기다.

바스티아는 슘페터로부터 ‘탁월한 경제평론가이지만 이론가는 아니다’는 평가를 받았지만 멩거, 미제스, 하이에크 등을 주축으로 하는 오스트리아 학파의 이론적 선구자라는 게 일반적 평가다. 화폐는 자유로운 진화의 결과라는 인식, 가치는 주관적이며 자발적인 교환을 통해서 형성된다는 가치이론, 가격통제와 정부개입의 무능, 시장은 수많은 시장 참여자들의 다양한 이해관계를 조정하는 것이라는 견해 등 오스트리아 학파의 이론적 핵심은 바스티아에서 비롯됐다는 지적이다.

바스티아는 자유무역협회를 설립하고‘자유무역’이란 정기간행물을 발간, 자유시장과 자유무역의 지적 운동도 주도했다. 그의 운동은 영국 독일 벨기에 이탈리아 스웨덴 등 유럽대륙으로 확산됐다. 19세기 후반 유럽 대륙의 시장 개방에 미친 그의 영향은 대단히 컸다는 평가다.

바스티아의 영향이 가장 크게 미친 나라는 스웨덴이었다. 그의 자유주의 사상을 추종하는 세력이 형성돼 1870년대 스웨덴의 경제개혁을 이끌었다. 수출입의 제도적 장애물을 제거, 자유무역을 확대했던 것도 스웨덴의 바스티아 추종자들 영향이었다. 정부 보조금을 요구하는 사회주의 위험성을 경고하면서 규제를 풀어 자유의 길로 나아갔다. 흥미로운 것은 스웨덴의 자본세다. 누진세가 아니라 단일세율이다. 이는 자본은 노동의 친구라는 바스티아의 사상으로부터 받은 영향이 아닐 수 없다.

민경국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