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도 매달릴 나무가 있었으면 좋겠다’ 하고 시의 첫 구절을 써놓고 그 다음부터는 쓸 수가 없어서 컴퓨터 앞에 멍하니 앉아 있다.

삶을 살아갈 때 편리한 도구가 많지만 여전히 손으로, 느낌으로 다가갈 때 제 모습이 드러나는 사물들이 있다. 연필, 나무, 종이 같은 것이 그런 것에 속한다. 우리 마음도 나무처럼 나이테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 신기하다. 나무 속을 들여다보기는 어렵지만, 나무는 자기 아름다움을 나이테로 만들며 생성해 나간다.

사람의 마음도 같지 않을까. 들여다볼 수 없지만 향기가 나는 사람의 마음은 나무의 나이테처럼 은은한 무늬를 지니고 있을 것 같다. 시(詩)라는 한자가 ‘언(言)+사(寺)’이니, 그것을 풀어보면 시는 ‘말씀의 사원’쯤 된다. 사원에 갈 때 사람들은 절대 서두르지 않을 것이다. 천천히 그리고 마음을 가다듬으며 자기의 욕망을 맑게 가라앉힌다.

한때 연필로 종이에 꾹꾹 눌러 쓰지 않으면 시를 못 쓰던 시절이 있었다. 시를 쓸 때의 자세가 그러한 것 같다. 성급해서는 좋은 시를 쓸 수 없다. 말씀을 연필처럼 깎아내며 사물과 말이 함께 만나 풍겨내는 향내를 음미하며, 천천히 종이 위에 언어를 얹어놓아야 한다. 컴퓨터가 편리하기는 하지만, 아무래도 시를 쓸 때는 원고지나 노트에 연필로 써야 한다. 그런데 내 경험으로는 시는 어린 학생들이 글씨를 배울 때 종이 위에 꾹꾹 눌러쓰는 몽당연필로 써야 제 맛이다. 연필을 깎을 때의 냄새가 미친 듯이 좋아야 시의 맛이 제대로 우러난다.

시가 연필과 비슷한 성질을 지니고 있다는 것, 지울 수 있지만 끝내 자기 냄새를 갖고 있다는 것, 세상의 모든 것이 자기 존재 증명을 위해 확실함의 성채(城砦)를 쌓아나갈 때 연필은 여전히 자기 존재를 지울 수 있게끔 자기 몸 뒤에 지우개를 달고 있다. 그러면서 자기를 버리고 마침내는 닳아서 몽당연필이 된다. 아마도 시는 그런 몽당연필로 꾹꾹 눌러쓰다가 지워버린 그 흔적들 같은 것이 아닐까. 그 흔적들이 간직하고 있는 향기의 추억이 아닐까. 무엇을 알았다고, 그래서 세상을 확실하게 제것으로 만들었다고 소리치기 위해서가 아니라 무엇인가를 사랑하기 위해서 남겨진 그런 열망들이 아닐까.

우리는 KTX 열차를 타고 있는 것처럼, 우리 삶을 너무 빨리 스쳐지나가고 있다. 우리들에게는 뒤돌아볼 새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여행을 떠날 때 차창 밖의 풍경이 아름다워 목적지가 아닌데도 짐을 꾸려 낯선 간이역에서 내려본 적이 있는지. 우리에게는 이렇게 몸의 체험, 특히 손의 체험이 어느 것보다 우리 마음에 깊숙하게 새겨지는 것을 대하는 순간이 있다. 마치 어머니가 아픈 배를 문질러주듯이, 그 어머니의 약손이 어느 양약(洋藥)보다 더 깨끗하게 몸을 낫게 해주듯이. 물론 속도와 젊음이 제일인 세상에서 천천히 나이 들면서 사는 즐거움을 알면서 산다는 것은 쉬운 일만은 아니다. 누군들 주름살로 뒤덮인 얼굴로 뒤처져 사는 것을 좋아하겠는가.

하지만 한 사람의 인생을 가치있게 만드는 것은 계산할 수 없는 것들이다. 낭만주의의 대표적 시인으로 불리는 워즈워스에게 어느날 하녀가 다음과 같이 충고했다고 한다. “주인님의 서재는 야외입니다.” 방에서 어슬렁거리며 생각만 해서는 좋은 시가 나오지 않는다는 것을 그 하녀는 시인보다도 잘 알았던 모양이다.

이와 같이 자연을 탐험하는 것은 마음을 탐험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다. 그러니 언제까지 컴퓨터 앞에 앉아서 ‘클릭’과 ‘드래그’로 모든 것을 해결하려만 할 것인가. ‘나무’에 관한 시를 쓰려고 백과사전을 뒤지고 나무의 이름과 속성을 외우기보다는 차라리 밖에 나가 어둠 속의 나무를 만지고 안아보는 것이 내가 지금 쓰려고 하는 시보다 더 시적일 것이다.

겨울밤 어둠 속에서 별을 이고 있는 벗은 겨울나무에게 걸어가다 보면 쓰지 못한 시의 뒷 문장이 저절로 내 걸음 속에서 태어날 것이다. 겨울의 어두운 밖에 나가자, 거기에 시가 있고 삶이 있다.

박형준 < 시인 agbai@naver.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