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달 5일께로 예정된 법원 정기인사를 앞두고 옷벗는 중견 판사들이 늘고 있다. 경제적인 사유가 주를 이루지만 법률시장 개방에 따른 외국 로펌의 대거 국내 진출도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친 것으로 알려졌다.

23일 대법원에 따르면 최근 고등법원 부장판사급 고위법관 8명이 사표를 낸 데 이어 지방법원 부장판사 15명가량이 사표를 냈다. 서울행정법원에서 부장판사 3명이 사표를 낸 것을 비롯해 사법연수원 21~25기 부장판사 10여명이 사의를 밝힌 것으로 전해졌다. 이들은 수원지법, 수원지법 성남지원, 서울남부지법, 의정부지법, 인천지법, 대구지법, 사법연수원 등에 근무 중인 경력 20년 안팎의 중견 법관들이다. 법원장급 1~2명이 추가 사의를 표명할 가능성도 거론된다.

서울중앙지법 사직자는 한 명도 없다. 퇴임 후 1년 동안은 직전 소속 법원 관할 사건을 수임하지 못하도록 한 전관예우방지법의 영향 때문이라는 게 법조계의 분석이다. 서울행정법원의 한 판사는 “지법부장판사 사직자가 매년 7~8명 선인 것을 감안하면 예년의 2배 규모”라며 “고위법관들이 한꺼번에 사표를 낸 것도 이례적”이라고 말했다.

사직자들은 대부분 대형 법무법인(로펌)으로 옮겨가는 것으로 알려졌다. 태평양이 가장 많이 영입했고, 김앤장과 율촌에서도 1~2명씩 스카우트했다. 수도권 지법의 한 판사는 “로펌에서는 행정법원 출신이 인기가 높다”고 귀띔했다. 행정법원의 경우 재직하는 판사의 절대수가 적은 데다 민·형사법원의 일반 사건과 달리 전문성이 필요하기 때문에 재직 경험이 중요하다. 실제 행정법원에 갈 수 있는 인원은 같은 사법연수원 기수 중에서 2~3명에 불과하다.

사직 배경으로는 경제적 사유가 가장 큰 것으로 알려졌다. 판사 출신의 한 변호사는 “자녀들을 대학도 보내고 유학도 보내고 싶은데 공무원 월급으로는 버틸 수가 없다”고 말했다. 2~3년 법원장을 지낸 뒤 다시 일선 재판장으로 복귀해야 하는 평생법관제도 적지 않은 부담이라는 분석도 있다.

법원 안팎에서는 “결국 경제적으로 여유 있는 귀족판사만 남을 것”이라는 얘기도 나돈다. 법률시장 개방에 따라 외국 로펌이 대거 진출해온 것도 무더기사퇴와 무관치 않다는 관측도 있다. 외국 로펌의 국내 자문시장 잠식이 불을 보듯 뻔한 상황에서 국내 로펌들이 송무분야에서 경쟁력의 우위를 선점하기 위해 인재확보전에 나섰다는 분석이다.

김병일 기자 kbi@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