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ravel] 미궁의 섬…드라마틱한 신화의 실타래가 풀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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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 크레타
크노소스 궁전 유적 미노아 신화 무대
그리스인 조르바의 카잔차키스가 묻힌 곳
최고급 리조트 즐비…건강식 크레타 요리 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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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은 그리스의 크레타 섬에 갇혀 버렸다. 미궁에 빠진 듯 느리게 가는 시간…. 지중해 햇살은 아스라이 떨어지고 섬 사람들은 천년의 시간을 견뎌낸 느림의 미학으로 하루를 살아간다. 미궁(迷宮)을 헤매는 그리스 경제도 크레타 섬의 평화를 깨뜨리지는 못한다.
시인 호메로스는 ‘오디세이’에서 크레타를 ‘포도주처럼 검붉은 바다 한복판에 있는 아름답고 풍요로운 땅’이라고 묘사했다. 쪽빛일까, 와인색일까. 에게해는 어떤 색으로 표현하기가 어렵다. 분명 동남아 해변의 바다와는 다른데 그렇다고 해서 먹먹할 정도로 새까맣거나 지나치게 어둡지도 않다.
지중해의 아름다운 섬이라고 하지만 실상 시인의 말에는 과장이 좀 섞인 것 같다. 크레타 섬의 자연은 척박하다. 아름드리 거목이나 울창한 숲은 없는 대신 작은 관목들이 듬성듬성 서 있고 돌투성이의 땅은 거칠기까지 하다.
◆제주도의 4.5배…미노아 문명의 발상지
그리스에서 가장 큰 섬 크레타로 가려면 아테네의 남쪽 피레우스항을 거쳐야 한다. 주로 페리호를 타고 가는데 저녁에 떠나는 경우가 많아 낭만적인 밤바다의 기억을 간직할 수 있다. 교교한 달빛은 에게해 수면으로 부서져 내리고, 시간은 비현실적으로 흐른다.
신화의 섬으로 틈입하는 데는 첨단의 운송수단보다 배가 제격이다. 제법 속력을 내서 달렸는데도 크레타 섬까지 9시간 넘게 걸렸다. 뿌옇게 먼동이 터오르고 크레타 섬의 이라클리온 항구에 날이 밝아오기 시작했다.
크레타 섬은 신들의 아버지인 제우스의 고향이다. 동서로 길게 자신의 몸을 풀어놓은 고대 크레타 문명의 발상지다. 면적이 제주도의 4.5배에 이르니 단순히 섬이라고 부르기도 민망하다. 크레타 섬의 전성기는 미노아 문명이라고 불렸던 크레타 문명시대였다. 4000년이 넘는 유적지인 크노소스 궁전은 오랜 세월의 더께와 전쟁, 지진으로 인해 폐허에 가까울 정도로 훼손됐지만 남아 있는 흔적만 해도 크레타 문명의 위대한 자취를 능히 짐작하게 한다. 1000개가 넘었다는 방과 아직도 선연한 돌고래 프레스코 벽화는 사람들의 눈을 사로잡기에 충분하다. 신화를 되새기며 살펴보면 벽돌 하나 하나가 예사롭지 않게 다가온다.
크노소스 궁전은 그리스 신화의 가장 드라마틱한 부분이 전개된 곳이다. 반인반수(半人半獸) 혹은 우두인신(牛頭人身)의 신화가 바로 이곳에서 시작했다. 모든 사단은 크레타의 왕 미노스로 인해 일어났다. 제우스의 아들인 그는 포세이돈에게 아름다운 황소를 제물용으로 하사받았지만 신들에게 바치지 않았다. 분노한 포세이돈은 미노스의 아내 파시파에로 하여금 황소를 사랑하게 해 사람 몸에 소 머리를 얹은 괴물 미노타우로스가 태어난다. 미노스 왕은 건축의 신인 다이달로스에게 미노타우로스를 영원히 격리시킬 미궁을 지으라고 부탁한다.
◆미궁의 전설을 만나다.
한 번 들어가면 출구를 찾을 수 없는 ‘라비린토스’에 갇힌 미노타우로스를 죽인 것은 잘 알려진 아테네의 영웅 테세우스. 테세우스가 미궁에서 헤메지 않고 빠져나올수 있도록 실타래를 제공한 사람은 하필이면 미노스의 딸 아리아드네였다. 비록 괴물이라고는 하지만 자신과 이복형제를 죽이는 데 도움을 준 셈이다. 신화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비밀을 누설한 죄로 자신이 만든 미궁에 갇히게 된 다이달로스는 밀랍으로 새의 날개를 몸에 붙여 아들 이카루스와 함께 미궁을 빠져 나왔으나, 태양에 너무 가까이 간 이카루스는 날개가 녹는 바람에 하늘에서 떨어져 죽고 만다. 신의 영역에 도전하는 이에 대한 신들의 가혹한 응징은 때로 섬짓하기까지 하다. 그리스 신들은 강력한 힘을 가진 존재이기는 하지만 위대하지 않다. 인간들보다 용렬하기도 하고, 비윤리적이기도 하다. 인간들과 호흡하며 무수한 신화를 만들어 냈다.
미노아 문명을 처음 발견한 이는 영국 고고학자인 에반스였다. 1900년부터 무려 10년간의 발굴 활동을 통해 고대문명의 정수였던 미노아 문명의 흔적을 찾아냈다. 지금은 폐허가 되어버린 크노소스 궁전은 신화 속 미궁으로 추정된다. 신화와 현실이 공존하는 크레타 섬답게 작은 돌 하나도, 올리브나무 한 그루도 때로는 현실세계의 것 같기도 하고 신화 속 물건인 것 같기도 하다.
크레타 섬이 문명의 화려한 세례만 받았던 것은 아니다. 아니 오히려 고난과 치욕의 역사를 견뎌왔다. 크레타 섬은 미노아 문명 이후 근세까지 온갖 침탈에 시달렸다. 비잔틴 제국과 이슬람 교도의 지배를 받았고, 4차 십자군 원정 직후에는 베네치아인의 손아귀에 들어갔다. 오스만 튀르크의 침공을 받아 오랫동안 터키의 지배를 받기도 했다.
베네치아의 착취는 이슬람 지배기보다 더 가혹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그 지배의 흔적이 이라클리온 항구에 남아 있는 베네치아 요새다. 베네치아 요새는 13세기부터 이곳을 점령한 베네치아 공화국이 16세기에 세웠다. 베네치아 요새에 몰아치는 집채만한 파도는 지난했던 크레타의 과거 운명을 상징하는 것 같다.
크노소스 궁전으로 들어가는 것은 타임슬립을 하는 것과 같다. 이제 큰 칼을 차고 조심스럽게 크노소스 궁전의 지하 미로로 들어가자. 괴물은 무서운 소리를 내며 울부짖고 한 손에 실타래를 들고 있던 테세우스가 되어 미노타우로스를 무찔러야 한다. 크노소스 궁전에서 발견된 미노아 문명들은 이라클리온 고고학박물관에서 찾아 볼 수 있다. 크레타의 민속품을 모아 놓은 ‘리크노스타티스 민속박물관(lychnostatis.gr)’, 크레타 전통 공연을 즐길 수 있는 카토 카루자나의 민속촌도 여행 명소다.
◆화창하고 눈부신 크레타의 햇빛
크레타 섬 동북쪽에 자리한 산토리니가 휴양지로 명성을 얻고 있지만, 크레타 섬에도 북쪽 해안을 따라 고급 리조트가 즐비하다. 아기자기한 산토리니의 리조트에 비해 크레타의 리조트는 규모가 크고 화려한 편이다.
크레타 섬에서 가장 풍성한 선물은 햇빛이다. 1년에 햇빛을 볼 수 있는 날이 300일이나 된다. 햇빛은 화창하고 투명하고 강렬하다. 겨울이면 바람이 거세지고 거울 같던 에게해의 파도가 높아지지만, 햇빛만큼은 풍성하다.
척박한 땅에서 올리브 나무를 진초록으로 키워내고, 포도를 탐스럽게 영글게 하는 것은 이렇듯 눈부신 햇빛이다. 해산물과 풍성한 올리브유 덕분에 지중해 요리는 건강식으로 꼽힌다. 그중에서도 크레타 음식은 최고다. 크레타 섬은 잊고 지냈던 ‘잘사는 법’을 일깨운다. 화창한 햇빛과 신선한 음식, 한없이 평화로운 분위기로 ‘삶의 방식’을 되돌아보게 만든다. 원색의 바다, 청명한 대기, 성당에서 울리는 종소리가 여행자들을 그렇게 만든다. 크레타 섬은 ‘평화로운 세상’으로 들어가게 하는 마력을 지니고 있다. 크노소스 궁전 부근의 작은 마을 아르크하네스를 걷다 보면 마음이 한없이 평온해지는 것을 느끼게 된다.
바람이 심상치 않더니 바다가 잔뜩 성이 난 듯 거칠어졌다. 집채만한 파도가 베네치아 요새에 몰아쳤다. 거센 파도 앞에서 그리스가 낳은 세계적인 작가 니코스 카잔차키스가 생각난다. 그는 평생 자유를 갈망했다. 대표작 ‘그리스인 조르바’에서 카잔차키스는 “천국의 문이 열리지 않으면 예수의 허락을 기다리지 말고 문을 총으로 쏘아라. 하느님은 총을 두려워하지 않지만, 네가 총을 들고 있는 것을 보면 (자유를 얻기 위한) 전쟁에서 돌아온 것을 알고 문을 열어줄 것이니…”라며 자유를 갈망했다. 평생 자유를 갈망했던 카잔차키스의 묘지는 초라하다 싶을 정도로 단출하다. 나무 십자가 아래 돌무덤밖에 없지만 그의 묘비명에서조차 자유를 향한 갈망이 느껴진다. ‘나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나는 자유이므로.’
이제는 미궁의 섬을 빠져나갈 시간이다. 바다는 잦아들었고 다시 9시간의 출항을 위해 페리호는 잔뜩 긴장해 마른 기침을 뱉어낸다. 크레타 섬은 점차 멀어져가고 달그림자에 묻혀 다시 신화 속으로 밀봉됐다.
[여행 팁] 그리스 유일 6성급 리조트…에게해 테라피 스파도 유명…파리·로마·두바이 경유해야
그리스로 가는 직항편은 아직 없다. 프랑크푸르트, 파리, 로마, 이스탄불, 두바이 등을 경유해 아테네로 들어간다. 아테네의 피레우스항에서 크레타 섬까지 ‘미노안 라인(minoan.gr)’이 유람선급 페리호를 운행한다.
크레타 섬의 ‘그리코텔 아미란데스 호텔(grecotel.gr)’은 그리스에서 유일한 6성급 리조트다. 에게해에 바짝 붙여 지은 풀 빌라가 화려하고 고급스럽기로 명성이 자자하다. ‘알데마르’ 계열의 ‘크노소스 로열 빌리지 호텔(aldemarhotels.com)’은 바닷물을 끌여들여 만든 테라피 스파로 유명하다.
크레타 음식은 그리스에서도 최고로 친다. 신선한 야채에 올리브유를 듬뿍 치고, 페타 치즈를 얹은 상큼한 샐러드와 갓 잡아올린 신선한 해산물을 간결하게 조리해 낸 음식은 맛도 뛰어날 뿐 아니라 정신까지 맑게 해준다. ‘칼립소(hotel-kalypso.com)’에서는 최고의 장수 음식으로 꼽히는 크레타 요리를 직접 만들어 먹을 수 있다. 그리스 관광청(visitgreece.kr)에서 한글 여행정보를 제공한다.
최병일 여행·레저 전문기자 skycbi@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