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 게이츠가 연설 중 사용해서 유명해진 명언 중에 이런 것이 있다. “인생은 공평하지 않으니, 그것에 익숙해져야 한다(Life is not fair, get used to it).” 이 말에 쉽사리 수긍하지 못했던 이유는 인생이 공평하지 않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힘들었거나, 공평하지 않다는 것은 알지만 빌 게이츠 말대로 익숙해지지 않아서였는지도 모른다. 인생은 정말 공평하지 않은 것일까.

흔히 인생이 공평하지 않다고 말할 때 가장 먼저 떠올리는 것이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는 출생의 조건이다. 어떤 이는 태어날 때부터 돈과 권력의 심장부에 누워 있거나 세상을 매혹시킬 이기적인 유전자를 지니고 있다. 하지만 어떤 이는 찢어지게 가난해서 우유도 제대로 못 먹는 것도 모자라 신체장애까지 안고 태어난다. 성장과정에서도 최상의 환경에서 최고의 교육을 받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글자도 깨치지 못하고 겨우 기저귀나 떼었을까 싶은 나이에 삶의 현장에 뛰어들어 고된 노동을 견뎌야 하는 경우도 있다. 별다른 노력 없이도 부귀와 명예를 유지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죽도록 일해도 가난과 멸시에서 벗어날 수 없는 사람도 있다.

필자는 재작년 여름 스페인 여행을 하면서, 천재 건축가 안토니오 가우디의 건축물을 보면서 인생이 공평하지 않다고 느낀 것 같다. ‘카사 바트요’ ‘카사밀라’ ‘구엘 공원’ ‘사그라다 파밀리아’ 등 살아있는 거대한 생물체처럼 꿈틀거리는 그의 작품들 앞에서, 신은 왜 한 인간에게 저런 엄청난 상상력과 혁명적인 작품을 만들어 낼 수 있는 재능을 쓸어 부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게다가 생전에 자신이 번 돈 대부분을 기부했다는 말을 들었을 때, 재능에 더해 뜨거운 심장까지 선사한 신은 그에게만 특별했다고 느꼈다.

가우디는 집안 대대로 주물제조업을 하는 가난한 환경에서 태어났고, 어릴 때 심각한 류머티즘에 시달려 마음대로 나가서 놀거나 돌아다니지도 못할 정도로 병약했다. 학교에서도 선생들이 ‘천재’인지 ‘미친놈’인지 헷갈려서 교육상 애로를 겪었다. 가우디는 자신의 천재성이 대대로 주물업을 한 집안의 혈통 속에 들어 있다고 믿었다. 그는 설계는 물론 대장장이 일을 직접 할 수 있었고, 주물제조 과정을 통해 어릴 때부터 탁월한 공간 지각력을 가지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류머티즘으로 인해 지독한 고통과 환상에 시달렸다. 그는 이를 극복하기 위해 혼자 산책을 하면서 자연과 생물의 움직임을 관찰하는 과정을 통해 영감을 키워나갔다고 한다. 놀랍게도 그의 천재성은 흔히 우리가 생각하는 탄생의 불공평에서 만들어진 것이었다.

성경을 살펴보면 포도원 품꾼의 이야기가 나온다. 포도원의 재산관리인과 일꾼들은 일당 5만원으로 합의하고 일을 시작했다. 얼마 후 관리인은 공터에서 일없이 어슬렁거리고 있는 사람들을 보고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고 했고, 정오에도, 오후 3시에도 그렇게 했다. 심지어 오후 5시에도 아무도 써주지 않아 서성대는 이가 있어 포도원에 가서 일을 하라고 했다. 그런데 6시가 돼서 품삯을 나눠주는데, 관리인은 모든 이에게 똑같이 5만원을 나눠주었다. 그러자 종일 일한 자들은 불만을 털어놓으며 불공평을 주장했다. 그때 관리인은 자신은 계약을 어긴 적이 없으며, 늦게 온 사람을 똑같이 대하는 것은 자신의 관대함이니 그것을 탓하지 말라고 이른다.

성경의 이런 비유는 인간의 눈으로 불공평해 보이는 것 뒤에 숨겨진 신의 공평함을 뜻하는 것일까. 가우디의 가난과 병 뒤에 천재성을 숨겨놓듯이 말이다. 가우디에게도 사랑하는 여인이 있었지만 유부녀였던 탓에 평생 가슴에 품고 독신으로 살았다. 가우디 혼자서 바르셀로나 사람들을 먹여 살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관광수익을 벌어들이는데도, 길가에 쓰러진 가우디는 행색이 초라했던 탓에 알아보는 사람 없이 장시간 방치됐다가 숨졌다고 한다. 인생의 공평과 불공평을 보이는 것만으로 판단할 일은 아니지 싶다.

김다은 < 소설가·추계예술대 교수 daeun@chugye.ac.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