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후면 설이다. 가난했던 어린 시절 설날은 기다림과 설렘으로 다가오는 1년 중 가장 부자가 되는 날이었다. 설 한 달 전쯤부터 객지에 나가계신 아버지의 귀성을 손꼽아 기다렸던 기억, 새로 산 신발을 재봉틀 위에 곱게 모셔놓고 몇 번이고 몰래 신어보고 좋아했던 모습, 어머니와 통금(通禁)이 지난 시간까지 방앗간에 길게 늘어서서 기다리다 보면 요란한 기계음 뒤에 뽑혀 나오는 먹음직스러운 가래떡, 그리고 떡판에서 구름처럼 피어오르던 하얀 김….

아버지는 1년에 설, 추석 때 한두 번 다니러 오셨다. 오랜 기다림 끝에 기차역에 내리신 아버지는 중절모에 대나무로 얼금얼금 엮은 사과 광주리를 손에 든 모습이었다. 생각해보면 그때 아버지보다 지금 내 나이가 훨씬 많지만 아버지로서의 의젓함은 비교할 수도 없다.

새 옷을 얻어 입는 기회는 정말 1년에 한두 번. 맘에 드는 옷을 사달라고 철없이 조르면 어머니는 옷 가게를 몇 바퀴 돌고 나서야 겨우 흥정을 마무리하셨다. 그리고 금세 큰다며 항상 한 치수 큰 옷을 골랐다. 여덟 자식 뒷바라지에 늘 지쳐있던 어머니에게 명절은 또 얼마나 큰 부담으로 다가왔을까.

설 전날 잠든 동생 눈썹 위에 밀가루를 발라놓고 하얗게 센 눈썹에 깜짝 놀란 표정을 놀려대던 누나들의 모습은 긴 세월이 흘러도 잊히지 않는다. 목욕탕 풍경도 눈에 선하다. 1년에 설, 추석이 아니면 좀처럼 가기 어려운 동네 목욕탕은 명절 때가 되면 콩나물시루처럼 발 디딜 틈도 없었다.

1년 내내 설빔 같은 옷에 잔칫날 같은 음식, 추운 겨울에도 언제든 더운물이 펑펑 쏟아지는 등 모든 것이 너무도 풍족한 지금보다 옛 시절이 더욱 그리워지는 건 염일방일(一放一·하나를 잡으려면 다른 하나를 놓아야만 한다) 까닭 때문인가.

지금은 고향을 떠난 많은 사람들이 명절을 서울에서 보내다 보니 귀성도 점점 줄어들고, 또 어떤 사람들은 설 연휴를 해외여행으로 보내는 경우도 많은 것 같다. 나로서는 아직 엄두를 내지 못할 일이지만, 언젠가 바뀔지도 모르겠다. 옛 어른 말씀에 팔촌까지는 한 부엌에서 난다고 했는데, 이젠 친형제도 이런저런 사정으로 함께 못 하는 경우도 더러 있다. 명절이 되면 고향을 떠났던 그리운 이들이 한데 모여 쌓였던 정담을 나누며 못다 한 회포를 풀곤 했었는데 그런 시간이 점점 사라져간다. 사라져가는 시간만큼 더욱 허허로워지는 사람들. 가난했어도 온 식구가 함께 모여 살던 그 시절이 좋았다는 어머니 말씀은 가끔 손님으로 찾아오는 자식을 기다리는 긴 기다림과 외로움에서 나온 한숨이었음을 어리석게도 이제야 알 것 같다.

임창섭 < 하나대투증권 사장 csrim@hanafn.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