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현실의 산업정책 읽기] 정부는 산·학협력 손 떼라
어제까지 한솥밥 먹던 교육과학기술부가 둘로 쪼개지게 되자 집안 싸움이 극에 달하고 있다. 새로 만들어지는 미래창조과학부로 가는 쪽(옛 과학기술부)과 교육부로 떨어져 나오는 쪽이 산·학협력이라는 솥을 두고 서로 차지하겠다고 난리다. 산하단체들도 둘로 딱 쪼개져 총동원되는 양상이다. 이것이 산·학협력에 대한 갈망의 표출이라면 아마도 우리는 벌써 선진국 수준에 올라섰을 거다. 그러나 매년 나오는 국제기관의 국가경쟁력 분석을 보면 한국의 산·학협력은 영 신통치 않다. 교육도, 연구도 다 그렇다. 부처들이 서로 산·학협력을 맡겠다고 난리들인데 왜 이런 결과가 나오나.

산·학협력을 둘러싼 부처 간 이전투구의 본질은 따로 있다. 산·학협력 예산을 서로 거머쥐겠다는 잿밥싸움이다. 왜 그렇게 하냐고? 그 돈이면 대학들 줄 세울 수 있고, 공무원의 힘도 과시할 수 있다. 대학으로서는 로비를 해야 하니 공무원 그만두더라도 일자리까지 기대되는 그야말로 일거양득이다. 명목상 지원일 뿐 규제와 다름없는 효과다.

눈먼 돈, 도덕적 해이만 초래

대학에 가면 어느 부처 돈으로 지원됐는지 표시하느라 어지럽게 나붙은 간판들을 쉽게 볼 수 있다. 산·학협력의 시늉을 낸 것으로 치면 세계 최고다. 말이 산·학협력이지 정작 ‘산’과 ‘학’은 곁가지에 불과하다. 대신 정부가 그 중심부에 떡 하니 자리잡고 있는 게 지금의 산·학협력이다. 미안하지만 이 지구상에 정부가 인위적으로 나서 산·학협력에 성공한 나라는 어디에도 없다. ‘관제 산·학협력’은 돈을 주는 그때만 반짝하는 ‘거품 산·학협력’ ‘가짜 산·학협력’일 뿐이다.

역동적인 경제는 예외없이 대학의 ‘과학기술 연구’와 시장의 ‘기업가정신’이 활발히 결합되는 구조다. ‘진짜 산·학협력’이 필요한 이유다. 이런 협력이 가능하려면 무엇보다 당사자들의 동기부터 강해야 한다. 대학도, 기업도 그만큼 절박함이 있어야 한다는 얘기다.

산·학협력이 세계 최고라는 미국이 그 대표적 경우다. 미국 정부의 예산지원이 여의치 않게 돌아가자 대학들은 필사적으로 자구책을 찾아 나섰다. 서랍 깊숙이 처박아 놓았던 연구성과의 실용화에 눈을 돌린 것이다. 미국 기업들은 기업대로 후발국들의 거센 추격에 밀리면서 새로운 성장동력 찾기에 부심했다. 정부는 예산 대신 기업과 대학 간 협력의 장벽을 제거하는 법적 정비를 해줬다. 그러자 대학은 기업을, 기업은 대학을 찾는 ‘시장 메커니즘’이 작동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해서 폭발한 게 미국의 산·학협력이다. 미국의 ‘연구중심대학’이나 ‘실리콘밸리’ 등을 부러워하지만 그게 다 생존을 위한 처절한 몸부림의 결과였던 것이다.

[안현실의 산업정책 읽기] 정부는 산·학협력 손 떼라
시장 메커니즘 작동되게 해야


하지만 우리 현실은 정부 지원금이 늘어나자 진짜 산·학협력은 기피하는 기막힌 역설이다. 눈먼 돈이 사방에 깔렸는데 굳이 까다로운 산·학협력에 매달릴 이유가 없다. 대학들이 저마다 연구중심대학이 되겠다지만 웃기는 소리다. 정확히 표현하면 산·학협력과는 상관도 없는, ‘정부 연구비 따먹기 중심 대학’이 되겠다는 얘기다. 하기야 대학을 개혁한다는 목소리만 높을 뿐 부실대학들조차 국민 세금으로 연명하는 나라 아닌가. 이런 상황에서 산·학협력? 창조경제? 언감생심이다.

정부가 진짜 산·학협력을 바란다면 인력 교류조차 맘대로 안 되는 후진적 장애요인들부터 걷어내야 한다. 그러고도 정 지원을 하겠다면 공무원들 장난 못 치게 산·학협력을 잘하는 대학이 자동으로 더 많이 보상받는 시스템을 만들라. 세상이 뒤집힐 거다. 부처 간에 치고 박고 싸울 일도 없을 테고.

안현실 논설·전문위원 경영과학博 ah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