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출 8억달러로 시작해 504억달러로.’

1983년은 한국 반도체산업에 기념비적인 해다. 그해 2월8일 고(故) 이병철 삼성그룹 선대 회장은 세계 반도체를 주름잡던 일본의 심장, 도쿄에서 “반도체산업에 본격 진출하겠다”고 선언했다. 같은 달 23일에는 SK하이닉스의 전신인 현대전자가 출범했다. 그리고 12월1일 삼성전자가 64K D램 개발에 성공한다. 한국 반도체산업이 세계의 주목을 받는 순간이었다.

‘도쿄 선언’ 이후 30년간 한국 반도체의 ‘진군’은 칭기즈칸의 세계 정복과도 맞먹는 초스피드 승리의 역사였다. 삼성전자는 10년 만인 1992년 메모리 반도체 세계 1위에 올랐다.

한국이 질주하자 미국, 일본, 독일 경쟁사들은 상대방이 쓰러질 때까지 값을 낮추는 치킨게임 전략을 구사했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과감하고 선제적인 투자로 대역전의 신화를 일궈냈다. 조선, 철강산업 등은 국가적 지원과 거대 시장을 무기로 한 중국에 밀리고 있지만 반도체는 후발주자의 추격조차 용인하지 않는 철옹성을 구축했다.

지난 30년 동안 반도체 수출은 연간 8억달러에서 504억달러로 63배 증가했다. 반도체 관련 기업은 수십개에서 2400여개(2010년 기준 통계청 조사)로, 고용인원은 수천명 수준에서 13만6800여명으로 늘었다. 스마트폰 TV 가전 등 세계를 호령하는 한국 전자산업의 성장 뒤에도 반도체가 있다. 첨단 제품을 만들기 위해서는 그 기능을 뒷받침하는 반도체가 필수적이다.

한국 경제의 마르지 않는 돈줄, 산업의 쌀과 같은 반도체산업에도 그늘은 있다. 삼성전자는 미세공정기술 개발이 난관에 부딪쳐 후발 업체와의 기술 격차가 줄어 고심 중이다. 메모리 값은 불황으로 침체에 빠졌다. SK하이닉스는 대규모 투자를 이어가는 게 과제다. 투자를 늘릴수록 네덜란드 ASML 등 해외 반도체 장비 업체만 재미를 본다는 지적도 있다.

김현석 기자 realist@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