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차 세계대전으로 독일 경제는 파괴돼 회생 가능성이 희박해 보였다. 경제활동은 점령군에 통제받았다. 모든 재화는 배급제였다. 가격은 정부가 정했다. 암시장이 활개를 쳤다. 이런 처참한 상황에서 학계와 정치권의 뜨거운 쟁점은 독일은 장차 어떤 경제 질서를 추구해야 할 것인가의 문제였다. 이를 놓고 좌우 이념 갈등이 심각했다. 한편에서는 정부의 간섭이 없는 자유시장을, 다른 한편에서는 사회주의의 통제경제를 옹호했다.

이런 와중에 독일 경제가 가야 할 길은 통제경제도, 자유시장도 아닌 제3의 길이라고 주장하면서 ‘사회적 시장경제’를 창안해 제시한 인물이 등장했다. 경제학자 알프레드 뮐러-아르막이었다.

‘사회적’이라는 형용사와 시장경제를 합성한 ‘사회적 시장경제’는 자유와 사회적 균형이라는 두 가지 상반된 가치로 구성돼 있는 이념이다. 모든 것을 통제하던 나치 시대에 독일 시민들은 자유를 상실했던 경험 때문에 뮐러-아르막은 시장경제의 기초가 되는 가치로서 자유를 매우 중시했다. 사적 자율과 개인의 창의를 위해서도 개인의 자유와 재산권은 보호해야 할 소중한 가치라고 여겼다.

그러나 그런 가치를 절대적이라고 여기는 자유주의 경제 체제는 독일 국민이 추구하는 삶의 관심과는 적합하지 않다는 게 뮐러-아르막의 설명이다. 시장경제는 경쟁과 생산성을 통해 경제적 번영을 가져다주지만 그 속에는 빈곤의 원인이 있다는 이유에서다. 재산권과 자유무역, 직업의 자유에 대한 정부의 불간섭은 분배의 부도덕성, 부당한 가격, 빈곤자의 해방을 위한 기회의 제한 등 나쁜 결과를 초래한다는 것이 그의 인식이다. 더구나 시장경제는 실업과 위기에서 자유롭지 못하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경제적 자유가 확대될수록 빈곤층도 줄어들고 소득과 일자리도 증가한다는 논리를 간과했다는 비판도 받는다. 위기는 시장의 탓이라기보다는 정부 간섭 때문이라는 주장도 있다.

자본주의에 대한 그의 역사 인식도 부정적이다. 그는 19세기 자유방임 자본주의는 봉건시대의 억압적인 신분사회로부터 인간을 해방시켜 개인의 삶과 기회를 개선한 측면도 있지만 빈부의 격차는 물론이요, 빈곤과 무산자의 증가, 인구 밀집으로 도시의 주거환경이 열악해진 것 등 자본주의가 이런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고 주장한다.

결국 시장경제는 윤리적으로 깨끗하지 못하기 때문에 ‘세탁’할 필요성이 있다는 게 뮐러-아르막의 결론이다. 사회적 시장경제가 도덕적으로 흠결이 없다고 설명한다. 그가 말하는 ‘사회적’이라는 단어는 사회정의, 사회복지, 경제민주화 등 사회적 형평을 의미한다. 그는 자유와 재산권을 제한해서라도 정부가 나서서 ‘사회적’ 가치를 실현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독실한 기독교인이었던 뮐러-아르막은 노동자 삶의 안정을 위해 최저임금제도가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노동자의 일자리와 소득 안정을 위해 기업이 마음대로 해고하는 것을 막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기업 생산성을 위해 노동자를 해고하는 것은 부도덕하다는 이유에서다. 노동자 권익을 위해 노사자율권도 보장해야 한다고 설파했다.

뮐러-아르막은 그러나 이 같은 정부 규제가 ‘사회적’ 가치 실현이라는 그의 의도와는 달리 노동시장을 경직적으로 만들어 구조적 실업을 양산한다는 비판에 직면했다. 그는 정부가 재정통화정책을 통해 경기 변동을 억제하고 완전 고용을 실현할 의무가 있다고 주장하는데 이는 케인스를 대변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뮐러-아르막은 또 정부는 자녀부모수당, 생활부조, 실업수당 등 재분배 정책을 철저히 이행할 과제도 있다고 강조했다. 그리고 연금, 의료, 실업 등에 대해서는 국가 강제보험이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그러나 이런 사회적 시장경제론은 공룡 같은 거대 국가를 정당화한다는 의구심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구조가 취약한 산업 부문에 대한 금전적, 법적 지원도 인색해서는 안 된다는 그의 주장은 기업 경쟁력 제고를 위해 기업·산업 간 경쟁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일반적인 인식과 동떨어진다는 지적도 받았다.

그가 경제민주화를 위해 노동자 대표가 자본가와 동등한 자격으로 자기가 속한 기업의 의사결정에 참여하는 근로자 경영참여 제도 도입을 강조하는 것도 흥미롭다. 그에게 시장경제의 경제력 집중은 심각하게 보였다. 그래서 정부의 대기업 규제는 시장경제에서 사회적 균형을 실현하기 위한 국가의 중요한 과제라고 강조한다. 그러나 그는 시장경제가 독점 문제를 스스로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다는 이론적·역사적 인식을 무시했다는 비판도 나온다.

사회적 시장경제론의 백미(白眉)는 그것이 사회 통합의 원천이요, 사회 평화의 지름길이라는 주장이다. 자유주의냐, 사회주의냐를 놓고 좌우 이념 대립으로 몸살을 앓고 있던 독일 사회에서 서로 상반된 이념을 가진 시민을 ‘자유주의 아니면 사회주의’와 같이 한쪽 방향으로 통합하기는 불가하다는 것이 그의 인식이었다. 좌우를 아우르는 사회적 시장경제야말로 평화의 사도라고 설파했다.

뮐러-아르막은 경제학에 윤리학을 도입, 시장경제를 도덕적으로 만들려고 각별한 힘을 쏟았던 창조적 경제학자였다. 그의 사회적 시장경제이론은 전후 독일 사회의 이념적 혼란을 수습하는 데 기여했다. 그의 사상은 사회민주주의의 이론적 기초가 됐다는 평가를 받는다.

뮐러-아르막 사상의 힘

한국 헌법에도 영향 미쳐…제119조, 이념적 통합 담아

알프레드 뮐러-아르막이 정당하다고 여기는 정부의 역할은 복지 분배 성장 안정 등 다양하다. 정부가 바람직한 사회를 만들 수 있는 도덕적 지적 능력을 가지고 있다면 아무리 정부 과제가 많다고 해도 문제가 될 게 없다. 그러나 정부의 능력은 상당히 제한돼 있다는 게 오늘날 인식론의 연구 결과다. 그래서 정부의 무제한적인 능력을 전제로 한 그의 사회적 시장경제이론은 ‘치명적 자만’(하이에크)이라는 비판을 받는다.

사회적 시장경제 이념은 좌우 이념의 통합모델이라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 모델을 통해 첨예한 이념적 갈등을 해소하고 사회평화를 실현하려는 뮐러-아르막의 발상은 창의적이면서도 이상적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러나 그 모델의 실현을 위해 막대한 정부지출과 재분배 정책이 필요하기 때문에 이 같은 정책을 둘러싼 정치적 갈등은 불가피하다.

뮐러-아르막의 사상에는 정부간섭을 제한할 어떤 장치도 없다. 그는 시장친화적 간섭을 말하고 있지만 그런 간섭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일반적 견해다. 흥미로운 것은 시장경제를 수식하는 ‘사회적’이라는 용어다. 그 뜻이 막연해 사회적 시장경제는 더 이상 시장경제가 아닐 정도로 온갖 정부간섭도 다 용인한다는 비판도 있다. 뮐러-아르막의 사상은 그런 비판의 여지를 남겼지만 그의 영향은 작지 않다. 독일 기본법에 사회적 시장경제를 의미하는 ‘사회국가’를 천명하게 된 배경은 그의 사상이라는 게 일반적 평가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그런 간섭주의는 치명적인 결과를 야기했다. 1960년대 완전고용을 구가했던 독일 경제가 1970년대 이후에는 성장의 추락과 함께 실업이 지속적으로 늘어나 오랜 기간 10% 이상의 고실업으로 어려움을 겪은 때도 있었다. 이는 노동시장이 경직된 데 따른 것으로 기업은 신규 고용을 회피했고 복지 확대로 조세 부담자는 물론 복지 수혜자의 일할 의욕이 약화된 결과라는 점을 직시할 필요가 있다.

흥미로운 것은 뮐러-아르막의 사상이 한국 헌법에 미친 영향이다. 경제자유와 시장경제를 규정한 현행 헌법 제119조 제1항과 사회정의, 사회복지, 경제민주화를 규정한 제2항은 독일의 사회적 시장경제이론을 근간으로 했다는 게 많은 학자들의 평가다. ‘대한민국 헌법이 추구하는 경제 질서는 사회적 시장경제’라는 헌법재판소의 판결도 그 영향을 뚜렷하게 입증한다. 헌법 제119조는 자유주의와 사회주의의 이념적 갈등을 해소하고 헌법에 헌신하도록 하는 사회 통합의 의미가 담겨 있다는 주장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민경국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