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이 되면 대지는 알몸이 된다. 푸르름을 자랑하던 나무는 앙상한 가지만을 드러내고 대지를 뛰놀던 들짐승과 날짐승은 작별인사도 없이 종적을 감춘다. 밭 갈던 농부도 아랫목에 손을 담근 채 도무지 집 밖으로 나올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황량한 대지에 남겨진 것은 오직 인간이 낸 어지러운 생채기뿐. 울긋불긋 아름다움을 뽐내던 여름날의 영화는 아스라한 기억의 저편으로 사라졌다.

그 황량함이 못내 안쓰러웠던 것일까. 새하얀 눈이 말 없이 얼어붙은 대지의 손을 끌어 잡는다. 그는 그 보드라운 섬섬옥수로 땅의 덧난 자리를 살포시 덮어준다. 그의 따뜻한 애무 속에 비바람에 시달렸던 여름날의 아픈 기억은 흔적 없이 사라진다.

눈 덮인 대지 위로 드러나는 것은 세상의 본질적인 모습이다. 사물의 디테일은 사라지고 굵직한 실루엣만이 듬성듬성 모습을 드러낸다. 군더더기가 사라진 태초의 모습이다. 그 본질의 세계를 마주하면서 우리의 마음도 자연스레 본질을 향하게 된다. 눈 쌓인 창밖 풍경을 바라보며 때 묻지 않은 내 마음의 원형을 더듬어보자.

정석범 문화전문기자 sukbumj@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