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대 뒤편에 완만한 경사로로 쓰이던 세트가 점점 가팔라지더니 맨 윗부분에 줄리엣(김지영)이 등장했다. 서서히 올라가는 줄리엣의 왼팔은 손끝부터 어깨까지 우아하게 흔들리고, 무대 뒤 하얀 벽면에는 팔의 움직임을 확대한 그림자가 따라 흔들렸다. 보는 이들은 숨을 죽였다.

서울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에서 14일 개막된 발레 ‘로미오와 줄리엣’(사진)의 1막 마지막 장을 시작하는 발코니 장면 도입부. 방금 전 가면무도회에서 첫눈에 로미오(이동훈)와 사랑에 빠진 소녀의 흥분과 떨림을 묘사하는 이 장면은 안무가 장 크리스토프 마이요의 특징을 압축적으로 보여줬다. 단순하고 상징적인 무대 세트의 움직임만으로 배경이 바뀌고, 빛과 어둠으로 사람의 감정을 드러내고, 정형화된 마임 없이 손끝 동작에서도 섬세한 내면 묘사를 요구하는 마이요의 무대 미학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마이요는 수많은 안무 버전의 ‘로미오와 줄리엣’을 작곡가 세르게이 프로코피예프의 음악을 가감 없이 살리면서 감각적인 현대 발레로 재탄생시켰다. 주요 인물의 캐릭터도 재창조했다. 줄리엣은 연약하고 여성미 넘치는 모습이 아니라 주관이 뚜렷하고 적극적이면서 도전적인 여성으로 그렸다. 이 작품을 ‘줄리엣의 예술’이라고 할 만큼 비중도 키웠다. 국립발레단 대표 무용수 김지영은 그런 줄리엣을 완벽할 정도로 표현해 냈다.

줄리엣의 엄마 캐플릿 부인(김세연)도 주요 인물로 각색됐다. 남편 없이 가문을 이끌어가는 여장부로 조카 티볼트에게 묘한 감정을 드러낸다. 로렌스 신부(이영철)는 연극으로 치면 극을 이끌어가는 ‘1인칭 화자’ 역할이다. 그의 회상에 따라 극이 진행된다.

마이요 안무 발레를 보지 않았다면 낯설게 느껴질 수 있다. 하지만 단순한 세트 덕분에 더 집중하게 되는 무용수들의 춤과 몸짓, 숨소리를 따라가다 보면 고전 발레에서 느낄 수 없던 현대적이고 세련된 아름다움을 만날 수 있다. 17일까지 예술의전당, 27~28일 서울 강동아트센터에서 공연한다.

송태형 기자 toughlb@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