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대리는 최근 새로 부임한 박 부장에게 보고서를 올리기 전 작성한 문서의 글자체를 다시 한 번씩 확인하는 버릇이 생겼다. 한글 프로그램으로 보고서를 쓸 때는 글자체 중 반드시 ‘굴림’으로 작성하라는 박 부장의 말을 대충 듣고 ‘굴림체’로 썼다가 호된 질책을 받았기 때문이다. 김 대리는 겉보기에 거의 차이가 없는 굴림과 굴림체를 어떻게 구분할 수 있는지가 궁금해 박 부장에게 직접 물어봤다. 박 부장 왈 “굴림체로 따옴표를 쓰면 뒤에 이어지는 글자의 간격이 굴림보다 더 벌어집니다. 쓸데없이 간격을 넓히지 마세요.”

이뿐만이 아니다. 박 부장은 ‘글자 크기 12포인트, 줄 간격 160%, 장평(글자의 세로 대비 가로 비율) 100%’ 등 요구하는 내용이 지나치게 까다롭다. 이유는 간단하다. 그게 제일 보기 좋기 때문이란다. 그 뒤로부터 김 대리는 무슨 보고서를 만들든 박 부장이 원하는 스타일대로 모양을 먼저 맞춰 놓고 내용을 작성한다. 문제는 박 부장에게만 보고서를 쓰는 게 아니라는 것. “누구에게 보고하는지에 따라 문서 스타일을 바꿔야 하니 헷갈려 죽겠습니다.”

오늘도 수많은 보고서를 생산해내는 김 과장, 이 대리들. 인사 이후 바뀐 부서장의 스타일에 맞춰 보고서 양식을 수정하느라 진땀을 뺀다. 보고서를 올릴 좋은 타이밍을 잡는 것도 우리들의 몫이다. 이번 주 주제는 직장인들의 ‘보고서 스트레스’다.

◆내용보다 형식?

직장마다 유별나게 보고서 형식에 깐깐한 상사들이 있다. 대학에서 국어국문학을 전공한 최 부장은 맞춤법에 예민한 스타일. 그가 처음 왔을 때는 전 부서원이 ‘맞춤법 노이로제’에 시달렸다. 최 부장은 ‘1000’이라는 숫자를 쓸 때 ‘1’다음에 ‘,’를 쓰지 않았다는 이유로 전 부서원에게 20여분간 강의를 했다고. 이제는 보고서를 올리기 전 직원들끼리 서로 쓴 보고서를 돌려 보며 교열을 하기 시작했다는데.

다행히 최 부장의 맞춤법 강의는 오래 가지 못했다. 수년간 영업 현장에 있다가 본사로 온 최 부장이 하루에도 수십 건씩 쏟아지는 보고서 때문에 교열을 포기했기 때문.

하 주임은 보고서용 단어와 문장에 익숙지 않아 스트레스를 받는다. 특히 공문서를 쓸 때 단어 선택이 어렵다는데. “한 번은 ‘이러이러하니 결재해주시기 바랍니다’라고 썼다가 지적을 받았어요. ‘이러이러하오니 품의를 올립니다’가 더 격식에 맞는 표현이라나 뭐라나. ‘품의’ 같은 어려운 한자는 왜 쓰라는 건지. 최대한 공손하게 쓰는 게 좋다고 하는데 너무 지나친 것 아닌가요.”

◆인쇄도 스타일따라

상사가 원하는 내용과 형식을 모두 갖춰 보고서를 잘 썼어도 문제는 남아 있다. 작성한 보고서를 어떻게 프린트하느냐도 직장인들의 숙제 중 하나다. 최근 새로 부임한 사장에게 보고서를 들고 올라간 권 부장. 그는 이전 사장이 친환경을 강조한 탓에 늘 값싼 재활용 종이에 흑백으로 프린트를 했었다. 권 부장의 보고서를 본 사장 왈 “보고서를 보기가 너무 나쁩니다. 중요한 부분에는 색깔을 넣어서 컬러로 프린트해오세요. 그리고 나한테 가져오는 건 깨끗한 종이에다 하고요.” 덕분에 최근 권 부장의 회사는 두 종류로 문서를 출력한다. 간부용 보고서는 컬러로, 직원용 보고서는 흑백으로.

◆보고 타이밍이 중요

보고서를 언제 올리느냐도 문제다. 하루에도 몇 번씩 기분이 바뀐다는 진 부장의 부서원들은 그에게 보고를 할 좋은 타이밍을 잡느라 신경을 곤두세운다. 아침에 보고서를 올리는 것은 금물이다. 진 부장에겐 출근 후 한 시간 정도가 가장 날카로운 시간이기 때문. 오후 2시쯤 올리는 것이 가장 좋다고. 점심을 먹고 와서 15분 정도 눈을 붙인 후에 진 부장의 기분이 가장 좋기 때문이다. “아침에 올린 보고서는 절반 넘게 수정하라는 지시가 내려와요. 오후에는 부드럽게 넘어가는 날이 많고요.”

곽 차장도 부장에게 보고서를 제출하기 전에 부장의 컨디션부터 살핀다. ‘좋은 날’을 골라 보고하려면 기한보다 훨씬 전에 보고서를 완성해야 한다. 완성품을 만들어 놓고 하루 이틀 정도 부장의 심기를 살피며 ‘길일(?)’을 고르는 것이다. “보고서는 상사들이 후배들을 혼내기에 가장 좋은 수단이죠. 평소에는 아무 지적이 없던 보고서 양식도 심기가 좋지 않은 날에 걸리면 분풀이 대상이 됩니다. ”

◆결재 라인 잘 살펴야

보고서도 줄을 잘 서야 한방에 먹힌다. 한 과장네 부서에는 대외용 보고서 결재 라인 중간에 팀장 두 명이 있다. 문제는 두 팀장의 능력이 너무 차이 난다는 것. 최 팀장은 ‘개떡같이 만들어 올려도 찰떡같이 고쳐주는 것’으로 유명하다.

그러나 손 팀장은 후배들이 만든 보고서에 손만 대면 개악(改惡)을 만들어 놓는다고. 그가 고쳐 올린 보고서는 이 부장도 꼼꼼히 다시 본다. “같은 보고서도 최 팀장 손에 들어갔다 나오면 즉시 결재가 가능한데, 손 팀장한테 올리면 일을 두 번 해야 하는 경우가 많아요.”

◆잘 만들어도 문제

박 팀장은 회의 때 발표할 보고서를 파워포인트로 작성한 뒤 직접 촬영한 동영상을 넣었다. 글자로만 채워진 보고서와 함께 발표를 듣다 동영상을 본 임원들의 반응이 매우 좋았다는데. 이 때문에 다음 회의 때부터는 모든 팀이 보고서에 동영상을 삽입하기 시작했다. 문제는 배보다 배꼽이 더 커진 것. 보고서 만드는 시간보다 동영상을 찍고, 편집하는 데 훨씬 더 많은 시간이 걸린다. 처음 동영상을 만든 박 팀장은 사내에서 ‘공공의 적’이 됐다.

대학 다닐 때 각종 문서 작성 관련 자격증을 취득한 하 대리는 입사 초부터 두각을 나타냈다. 같은 문서도 다른 직원들보다 빨리, 그것도 더 잘 만들다 보니 하 대리에게 문서 작성 요청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하 대리를 눈여겨본 다른 부서 부장들도 어느새 그에게 용역을 주기 시작했고, 요구사항도 점점 늘어났다. “처음에 잘한다고 티를 낸 게 너무 후회됩니다. 군대에서나 회사에서나 변치 않는 진리는 ‘중간만 하라’는 것이에요.”

◆창작의 고통

대부분의 보고서에는 이미 ‘모범 양식’이 존재한다. 그러나 신사업을 할 때나 보스가 새로 오면 얘기가 달라진다. 입사 3년차인 정 대리는 그동안 보고서를 쓰기 전 상사들이 쓴 과거 보고서를 참조했다. 웬만한 보고서는 비슷한 내용과 형식으로 작성된 적이 있기 때문. 문제는 비슷한 보고서가 없을 때다. “처음부터 끝까지 스스로 작성해야 할 때 ‘창작의 고통이 이런 거구나’ 하고 새삼 느낍니다.”

김일규/고경봉 기자 black0419@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