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수 이장희 "사랑·사업·여행에 빠져봤지만 음악보단 못하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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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년 만에 새 앨범 내고 전국 투어 콘서트 떠나는 가수 이장희
음악 트렌드 이끈 독특한 노래
뜬구름 잡는 가사 대신 직설적 구어체…따라 부르기 쉬워 젊은이들에게 호감
복 받은 60대의 제2막 인생
7080세대 많은 팬들과 재회 기대…7월엔 실크로드 여행하며 새 삶 준비
음악 트렌드 이끈 독특한 노래
뜬구름 잡는 가사 대신 직설적 구어체…따라 부르기 쉬워 젊은이들에게 호감
복 받은 60대의 제2막 인생
7080세대 많은 팬들과 재회 기대…7월엔 실크로드 여행하며 새 삶 준비
“예순을 훌쩍 넘겼지만 요새 들어 가수로 다시 태어났다는 느낌을 종종 받아요. 1974년 이화여대에서 한 마지막 공연 이후 40여년 만에 그때 그 관객들을 다시 만날 생각을 하니 설렘으로 잠을 이루지 못할 정도입니다.”
1970년대 이장희의 등장은 가요계에 충격이었다. 번안 가요가 대부분이던 당시, 이씨는 직접 작사·작곡한 ‘나 그대에게 모두 드리리’ ‘한 잔의 추억’ ‘그건 너’ 등으로 대중을 열광케 했다. 그의 콧수염과 라이더 재킷은 청년 문화의 상징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의 가수 생활은 채 5년을 넘기지 못하고 ‘굵고 짧게’ 끝났다. 이후 미국으로 건너가 레스토랑과 한인방송 ‘라디오 코리아’를 경영하며 음악과는 거리를 두고 살았다.
올해는 그의 데뷔 42주년이자 라디오 코리아 대표직에서 은퇴한 지 10년째 되는 해다. 올해 예순여섯인 이씨가 다시 관객들과 마주하기로 결심했다. 내달 2일 서울 세종문화회관을 시작으로 전국 투어 콘서트에 나서는 이씨를 서울 대치동의 이탈리안 레스토랑 ‘카페M’에서 만났다. 카페M의 지하에 있는 공연장 마리아칼라스홀에서 연습 중인 이씨는 이 식당의 단골손님이다.
이씨는 “짧은 가수 생활 동안 콘서트는 두 차례밖에 하지 못했다”며 “이 나이에 전국 순회공연을 할 수 있다니 나만큼 복 받은 노인도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최근 음반도 새로 발표했다. 그는 2011년 윤형주 김세환 등 ‘세시봉’에서 함께 활동하던 동료들과 무대에 서기 위해 다시 기타 연습을 시작했다. 예전에 불렀던 노래들을 새로 녹음해 지난 19일 새 음반도 냈다.
“가장 애착이 가는 노래 하나를 꼽으라면 ‘나 그대에게 모두 드리리’가 아닐까 싶어요. 애 엄마에게 청혼할 때 만든 노래거든요.”
2012년은 ‘가수 이장희’가 재조명된 해였다. MBC ‘나는 가수다’, KBS ‘불후의 명곡2’ 등 TV 프로그램을 통해 젊은 세대도 그의 노래를 접할 수 있었다. 이씨는 “10~20대들로부터 ‘아저씨 노래 좋아요’란 얘기를 듣기도 했다”며 쑥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당시 노래를 만들 때 뜬구름 잡는 말 대신 실생활에 가까운 일상 언어를 쓰는 걸 원칙으로 삼았어요. 따라 부르기 쉬운 멜로디와 직설적인 가사가 요즘 사람들에게 잘 받아들여지는 게 아닐까요.”
1971년 데뷔 이후 수많은 히트곡을 남기며 전성기를 보냈지만 1975년 무대를 떠났다. 유신정권의 ‘가요 정화운동’으로 그의 곡에는 줄줄이 ‘금지곡’ 딱지가 붙었다. 설상가상 그해 12월 대마초 파동에 연루돼 20일가량 철창신세를 졌다. 이후 옷 장사에 뛰어들어 돈을 벌었고 김현식 김태화 등 후배 가수들의 곡을 쓰기도 했다.
“1980년 김태화가 부른 ‘바보처럼 살았군요’가 캐나다에서 열린 ‘태평양가요제’에 초청받아 제작자 자격으로 참석했어요. 돌아오는 길에 미국 뉴욕에 들렀는데 ‘내가 살 곳은 여기다’란 생각이 들었죠. 제가 그동안 밤낮으로 불렀던 게 미국 노래인데 본고장에 처음으로 갔던 셈이죠. 그날 저녁 아내에게 전화해 미국에서 살자고 했어요.”
미국에선 ‘로즈 가든’이란 레스토랑을 운영해 성공을 거뒀다. 1989년에는 라디오 코리아를 만들어 ‘언론사 사주’가 됐다. 1992년 ‘LA 폭동’ 구조본부 역할을 해 조지 부시 대통령으로부터 공로장도 받았다. 성공적인 사업가로 완벽하게 변신했지만 2003년 은퇴를 결심했다. 주파수를 빌려줬던 중국계 방송이 임대료를 두 배로 올려달라고 요구한 것이 계기였다.
“사실 1995년부터 은퇴를 생각하고 있었어요. 50세에 은퇴하고 트로이 유적을 찾는 데 매달렸던 하인리히 슐리만이 제 역할 모델이었거든요. 지금이다 싶어 빠르게 사업을 정리했어요.”
슐리만보다는 7년 늦게 은퇴했지만 그 못지않게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살고 있다. 은퇴한 이듬해 울릉도에 집을 짓고 1년에 절반은 미국에서, 절반은 한국에서 지내고 있다. 그는 자연 예찬론자다. 중학교 2학년 때 도봉산 계곡에 친구와 캠핑을 갔다가 학교까지 빼먹었을 정도다. ‘절친’인 기타리스트 강근식 씨가 군에 입대하기 직전에는 오토바이를 팔아 당시 대기업 사원의 석 달치 월급에 해당하는 7만원을 들고 전국을 돌아다녔다. 미국에 있는 동안에도 틈나는 대로 남극, 알래스카, 아마존 등을 찾아다녔다.
“폭스바겐에서 나온 소형 캠핑카가 있는데 미국에 사는 동안 똑같은 차를 3대 샀어요. 그 차를 몰고 데스밸리, 그랜드캐니언, 요세미티국립공원 등을 원 없이 다녔죠. 특히 데스밸리는 100번 이상 갔는데, 나무 하나 없이 산 자체만으로 만들어진 데스밸리에 가면 순수함이 무엇인지 느끼게 돼요.”
오는 7월에는 한 달 일정으로 중국 시안(西安)부터 터키 이스탄불까지 여행할 계획이다. 지금까지 해왔던 수많은 일 가운데 무엇이 가장 좋았느냐고 묻자 “연애, 사업, 여행 어느 하나 빠지지 않고 다 좋다”고 말했다. 이어 잠시 뜸을 들이던 그는 “그래도 음악만은 못하다”고 말을 바꿨다. “음악에 몰입할 때에는 내가 완전히 사라진 느낌을 받을 수 있어요. 또 다른 내가 된 듯한 기분도 들고요.”
내달 2일 서울 시작…대전·대구·전주 순회공연
기타리스트 강근식 씨와 함께 진솔한 노래인생 들려줄 것
“제가 직접 가사와 곡을 쓴 노래들에는 당시의 제 인생이 그대로 담겨 있습니다. 그간의 삶을 진솔하게 보여 드리는 무대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이장희 씨는 내달 2일 서울을 시작으로 1개월 동안 전국 5개 도시를 돌며 공연한다. 부산 벡스코 오디토리움(9일), 대전 충남대 정심화홀(16일), 대구 수성아트피아 용지홀(22~23일), 전주 한국소리문화의전당 모악당(4월6일) 순서다.
이씨는 기타리스트 강근식 씨와 함께 무대에 오를 예정이다. 강씨는 ‘나 그대에게 모두 드리리’를 비롯해 ‘세시봉’ 멤버들의 음반 대부분에 연주자로 참여한 절친한 친구다. 둘은 대학생 시절 클럽에서 함께 공연했고, 40년 가까이 지났지만 여전히 가장 가까운 친구다.
이씨는 “‘그애와 나랑은’ ‘잊혀진 사랑’ ‘편지’ 등 예전 곡들은 물론 팝송 등 총 15곡 정도를 들려줄 계획”이라고 설명했다.
이승우 기자 leeswoo@hankyung.com
1970년대 이장희의 등장은 가요계에 충격이었다. 번안 가요가 대부분이던 당시, 이씨는 직접 작사·작곡한 ‘나 그대에게 모두 드리리’ ‘한 잔의 추억’ ‘그건 너’ 등으로 대중을 열광케 했다. 그의 콧수염과 라이더 재킷은 청년 문화의 상징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의 가수 생활은 채 5년을 넘기지 못하고 ‘굵고 짧게’ 끝났다. 이후 미국으로 건너가 레스토랑과 한인방송 ‘라디오 코리아’를 경영하며 음악과는 거리를 두고 살았다.
올해는 그의 데뷔 42주년이자 라디오 코리아 대표직에서 은퇴한 지 10년째 되는 해다. 올해 예순여섯인 이씨가 다시 관객들과 마주하기로 결심했다. 내달 2일 서울 세종문화회관을 시작으로 전국 투어 콘서트에 나서는 이씨를 서울 대치동의 이탈리안 레스토랑 ‘카페M’에서 만났다. 카페M의 지하에 있는 공연장 마리아칼라스홀에서 연습 중인 이씨는 이 식당의 단골손님이다.
이씨는 “짧은 가수 생활 동안 콘서트는 두 차례밖에 하지 못했다”며 “이 나이에 전국 순회공연을 할 수 있다니 나만큼 복 받은 노인도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최근 음반도 새로 발표했다. 그는 2011년 윤형주 김세환 등 ‘세시봉’에서 함께 활동하던 동료들과 무대에 서기 위해 다시 기타 연습을 시작했다. 예전에 불렀던 노래들을 새로 녹음해 지난 19일 새 음반도 냈다.
“가장 애착이 가는 노래 하나를 꼽으라면 ‘나 그대에게 모두 드리리’가 아닐까 싶어요. 애 엄마에게 청혼할 때 만든 노래거든요.”
2012년은 ‘가수 이장희’가 재조명된 해였다. MBC ‘나는 가수다’, KBS ‘불후의 명곡2’ 등 TV 프로그램을 통해 젊은 세대도 그의 노래를 접할 수 있었다. 이씨는 “10~20대들로부터 ‘아저씨 노래 좋아요’란 얘기를 듣기도 했다”며 쑥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당시 노래를 만들 때 뜬구름 잡는 말 대신 실생활에 가까운 일상 언어를 쓰는 걸 원칙으로 삼았어요. 따라 부르기 쉬운 멜로디와 직설적인 가사가 요즘 사람들에게 잘 받아들여지는 게 아닐까요.”
1971년 데뷔 이후 수많은 히트곡을 남기며 전성기를 보냈지만 1975년 무대를 떠났다. 유신정권의 ‘가요 정화운동’으로 그의 곡에는 줄줄이 ‘금지곡’ 딱지가 붙었다. 설상가상 그해 12월 대마초 파동에 연루돼 20일가량 철창신세를 졌다. 이후 옷 장사에 뛰어들어 돈을 벌었고 김현식 김태화 등 후배 가수들의 곡을 쓰기도 했다.
“1980년 김태화가 부른 ‘바보처럼 살았군요’가 캐나다에서 열린 ‘태평양가요제’에 초청받아 제작자 자격으로 참석했어요. 돌아오는 길에 미국 뉴욕에 들렀는데 ‘내가 살 곳은 여기다’란 생각이 들었죠. 제가 그동안 밤낮으로 불렀던 게 미국 노래인데 본고장에 처음으로 갔던 셈이죠. 그날 저녁 아내에게 전화해 미국에서 살자고 했어요.”
미국에선 ‘로즈 가든’이란 레스토랑을 운영해 성공을 거뒀다. 1989년에는 라디오 코리아를 만들어 ‘언론사 사주’가 됐다. 1992년 ‘LA 폭동’ 구조본부 역할을 해 조지 부시 대통령으로부터 공로장도 받았다. 성공적인 사업가로 완벽하게 변신했지만 2003년 은퇴를 결심했다. 주파수를 빌려줬던 중국계 방송이 임대료를 두 배로 올려달라고 요구한 것이 계기였다.
“사실 1995년부터 은퇴를 생각하고 있었어요. 50세에 은퇴하고 트로이 유적을 찾는 데 매달렸던 하인리히 슐리만이 제 역할 모델이었거든요. 지금이다 싶어 빠르게 사업을 정리했어요.”
슐리만보다는 7년 늦게 은퇴했지만 그 못지않게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살고 있다. 은퇴한 이듬해 울릉도에 집을 짓고 1년에 절반은 미국에서, 절반은 한국에서 지내고 있다. 그는 자연 예찬론자다. 중학교 2학년 때 도봉산 계곡에 친구와 캠핑을 갔다가 학교까지 빼먹었을 정도다. ‘절친’인 기타리스트 강근식 씨가 군에 입대하기 직전에는 오토바이를 팔아 당시 대기업 사원의 석 달치 월급에 해당하는 7만원을 들고 전국을 돌아다녔다. 미국에 있는 동안에도 틈나는 대로 남극, 알래스카, 아마존 등을 찾아다녔다.
“폭스바겐에서 나온 소형 캠핑카가 있는데 미국에 사는 동안 똑같은 차를 3대 샀어요. 그 차를 몰고 데스밸리, 그랜드캐니언, 요세미티국립공원 등을 원 없이 다녔죠. 특히 데스밸리는 100번 이상 갔는데, 나무 하나 없이 산 자체만으로 만들어진 데스밸리에 가면 순수함이 무엇인지 느끼게 돼요.”
오는 7월에는 한 달 일정으로 중국 시안(西安)부터 터키 이스탄불까지 여행할 계획이다. 지금까지 해왔던 수많은 일 가운데 무엇이 가장 좋았느냐고 묻자 “연애, 사업, 여행 어느 하나 빠지지 않고 다 좋다”고 말했다. 이어 잠시 뜸을 들이던 그는 “그래도 음악만은 못하다”고 말을 바꿨다. “음악에 몰입할 때에는 내가 완전히 사라진 느낌을 받을 수 있어요. 또 다른 내가 된 듯한 기분도 들고요.”
내달 2일 서울 시작…대전·대구·전주 순회공연
기타리스트 강근식 씨와 함께 진솔한 노래인생 들려줄 것
“제가 직접 가사와 곡을 쓴 노래들에는 당시의 제 인생이 그대로 담겨 있습니다. 그간의 삶을 진솔하게 보여 드리는 무대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이장희 씨는 내달 2일 서울을 시작으로 1개월 동안 전국 5개 도시를 돌며 공연한다. 부산 벡스코 오디토리움(9일), 대전 충남대 정심화홀(16일), 대구 수성아트피아 용지홀(22~23일), 전주 한국소리문화의전당 모악당(4월6일) 순서다.
이씨는 기타리스트 강근식 씨와 함께 무대에 오를 예정이다. 강씨는 ‘나 그대에게 모두 드리리’를 비롯해 ‘세시봉’ 멤버들의 음반 대부분에 연주자로 참여한 절친한 친구다. 둘은 대학생 시절 클럽에서 함께 공연했고, 40년 가까이 지났지만 여전히 가장 가까운 친구다.
이씨는 “‘그애와 나랑은’ ‘잊혀진 사랑’ ‘편지’ 등 예전 곡들은 물론 팝송 등 총 15곡 정도를 들려줄 계획”이라고 설명했다.
이승우 기자 leeswoo@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