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 불황기에도 상가를 장기로 임차하는 사람들은 자영업에 처음 뛰어든 장사 초보자가 대부분이다. 이들은 예상 수익을 부풀려 얘기하는 주변 사람의 ‘농간’에 휘말려 섣불리 장기 계약서에 사인했다가 낭패를 당하곤 한다는 지적이다.

○장기 계약 따른 피해 사례 많아

장사 안되는데 '5년 계약'에 묶여…점포 망해도 월세 '자동 입금'
상가 임대차 계약기간을 장기로 하는 관행이 서울 강남에서만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경기 불황 때는 지방에서도 심심찮게 볼 수 있는 현상이다.

장사 초보였던 김민정 씨(42)는 경북 경산시청 인근에 2007년 8월 99㎡(약 30평)짜리 점포를 계약해 횟집을 열었다. 계약 기간이 5년이어서 조금 찜찜했지만 보증금 2000만원에 월세 150만원의 임차 조건과 입지가 좋아 보여 선뜻 계약했다. 김씨는 20개월을 근근이 버티다 문을 닫았다. 나머지 40개월은 장사 한번 못해보고 월세만 꼬박꼬박 냈다. 건물 주인은 “장사할 사람은 임차인이 찾아야 한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박금례 씨(55)도 2003년 8월 대전 만연동에서 396㎡(약 120평) 규모 점포를 얻어 음식점을 창업했다. 넓은 주차장이 마음에 들어 월세 1100만원에 계약을 맺었지만 월 매출 4000만원으로는 적자를 면할 길이 없었다. 건물 주인은 특약사항 100가지를 담은 8쪽짜리 임대차계약서를 들이밀었다. 특약에는 ‘계약 기간 5년에 2년마다 임대료 인상, 주차장 사용료 별도 부과(월 165만원)’ 등의 조항이 들어 있었다. 박씨는 3년을 버티다 다른 사람에게 점포를 넘기고 빠져나왔다.

○법규도 임차인 보호엔 미흡

현행 ‘상가건물 임대차보호법’은 적용 대상을 영세상인으로 제한하고 있다. 계약갱신 거절 등과 관련해 이 법의 보호를 받는 환산보증금(임차보증금+월세×100)은 서울시 3억원, 수도권 2억5000만원, 광역시 1억8000만원, 중소도시 1억5000만원 등이다.

서울지역을 예로 들면 보증금 1억원, 월세 200만원을 한푼이라도 초과하면 이 법은 무용지물이다. 보증금이 최대 30억원을 호가하고 월세 500만원 이하 점포를 찾기 힘든 서울 강남역이나 명동 상권은 말할 것도 없고, 동네 상권인 목동오거리 상권도 보증금 1억원 이상, 월세 250만원 이상 점포가 절대 다수다. 서울 강남구 신사동의 연세공인 오동근 대표는 “요즘 같은 불황기에는 비싼 권리금을 내고 들어올 사람을 찾는 게 쉽지 않다 보니 장기 계약을 한 임차인들이 비싼 월세만 내고 손해를 더 키우게 된다”고 말했다.

이처럼 임차인들이 장기 계약의 함정에 빠지지 않으려면 발품을 팔아 철저히 준비해 창업에 나서야 하지만 제도적으로 개선할 필요가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강병오 FC창업코리아 대표는 “2001년 제정된 상가건물임대차보호법은 일본의 차지차가법(借地借家法)을 벤치마킹한 것이지만 현장에서는 정반대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며 “법정에서도 임대인에게 유리한 판례가 양산되고 있다”고 말했다.

○제도 개선 논란 여전

법 개정으로 이런 문제를 해결하는 데도 한계가 있다는 지적이다. 보호 대상 보증금 범위를 높이면 임대인들의 재산권 및 은행 대출 한도 등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점에서다. 권리금이 있는 상권에선 임차인이 장기계약을 요구하기도 한다.

국회에서도 법 개정안이 논의되고 있지만 당사자들의 이해가 엇갈려 논란은 이어질 전망이다. 국회 국토해양위원회 소속 이노근 새누리당 의원은 ‘보증금 인상 범위를 지금의 9%에서 7%로 낮추고, 임차인이 계약갱신을 요구할 수 있는 기간을 현행 5년에서 7년으로 늘리는’ 내용의 상가임대차보호법 개정안을 대표발의한 상태다.

강창동 유통전문/이현일 기자 cdka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