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기업에 다니는 ‘워킹맘’ 신 대리는 요즘 연월차휴가 때문에 속앓이를 해야 했다. 지난달 이사에 아이 예방접종 때문에 연월차휴가를 미리 다 당겨 썼는데, 이번에 유치원 졸업식이 다가온 것. 평소 잘 못 챙겨주는 아이에게 ‘유치원 졸업식만큼은 꼭 가겠다’고 약속을 해둔 터다. 하지만 최근 새로 맡은 프로젝트 때문에 팀이 한창 바쁠 때라 또 혼자 쉰다고 말하기엔 눈치가 보였다.

신 대리는 일단 아침에 출근한 후 ‘화장술’을 동원해 최대한 안색을 창백하게 만들고 온몸으로 아픈 연기를 해 병가를 얻었다. 졸업식을 무사히 마치고 난 다음날 아침 커피자판기 앞에서 만난 부장이 ‘몸은 좀 괜찮느냐’고 묻는데, 같은 유치원에 아이를 보내는 영업팀 김 과장이 눈치 없이 다가와 건넨 한마디. “신 대리, 어제 졸업식 때 진짜 화사하더라. 회사 올 때도 그렇게 입고 다니지~.”

‘워킹맘’들이 1년 중 가장 스트레스를 받는 때가 졸업 입학 시즌이다. 사내에선 ‘폭풍 업무’를 견뎌내는 한편 학기를 시작하고 마무리하는 내 아이도 잘 챙겨주고 싶다. 새 학기를 맞아 회사와 아이 사이에서 아슬아슬한 줄다리기를 하는 워킹맘 김과장이대리들의 이야기를 모아 본다.

◆전업주부들에게 물량 공세

워킹맘들이 새 학기에 신경을 쓰는 사람에는 아이 선생님과 함께 전업주부들을 빼놓을 수 없다. 전업주부들이 지닌 정보력과 선생님에게 미치는 영향력을 결코 무시할 수 없다. 대기업 직원 이 과장은 작년 아이의 봄소풍 때 특명을 받고 길을 나섰다. “엄마, 이번에 진호네 아줌마 만나면 좀 친하게 지내. 나도 다른 애들이랑 주말에 진호네 가서 놀고 싶어.” 도시락을 먹을 때 진호엄마 옆자리에 앉으려 했지만 진호엄마는 이미 전업주부 엄마들과의 자리를 주도하고 있었다.

이 과장은 ‘이래선 내 아이까지 왕따 되겠다’는 걱정에 그 뒤로 학부모 모임에 갈 때마다 회사 사은품을 잔뜩 챙겨 하나씩 나눠준다. 그러자 다른 엄마들이 먼저 “OO엄마~ 대기업 다니는데 회사 콘도 없어? 애들 데리고 다 같이 가면 좋은데 말야”하며 한술 더 뜬다.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다가도 내 아이 생각하면 어쩔 수 없죠. 엄마들 커뮤니티에 못 끼면 아이 학교 생활이 엄청 힘들어져요.”

◆‘일하는 티’ 내는 건 금물

학부모 모임에서 잘 어울리려면 절대 ‘일하는 티’를 내선 안 된다. 시쳇말로 ‘잘나가는’ 여자로 보이는 순간 왕따 되기 십상이다. 불쌍한 여자로 포지셔닝해야 그나마 궁할 때 도움을 받을 수 있다. 최 대리는 작년 봄 학수고대하던 뉴욕 출장을 가게 됐지만 학부모 설명회와 겹쳐 고민이 됐다. 뉴욕 출장을 간다고 학부모 설명회 정보 좀 달라는 말이 입에서 잘 떨어지지 않았다. “결국 삼척으로 가기 싫은 출장 간다며 불쌍한 척 부탁했어요. 모든 여자의 로망인 뉴욕에 가는데, 티 하나 못 냈다니까요.”

외국계 회사에 다니는 워킹맘 박모 과장은 일에 대한 성취감을 드러내는 글을 쓰거나 멋지게 차려 입고 럭셔리한 공간에서 일하는 모습을 담은 사진을 올리면 엄마들의 댓글이 확 줄어드는 것을 느꼈다. 그래서 얼마 전엔 ‘요즘 힘들다, 회사 가기 싫다’는 글과 새벽 출근길 사진을 올렸더니 전업주부 엄마들은 그제서야 “OO엄마 힘내. 그래도 맨날 집에 있는 우리보다는 낫잖아”라며 격려의 리플이 쇄도했다. 엄마들 마음은 대체 뭘까.

◆끝말 잇기에도 업무의 흔적이…

유치원생 딸을 두고 있는 대기업 홍보팀 김 과장은 최대한 일과 가정을 분리하려고 하지만 뜻대로 되지 않는다. 휴일에 집에 있을 때도 회사에서 전화가 걸려오는 일이 적지 않다. 한번은 아이와 끝말 잇기를 하던 중 김 과장이 ‘간장’이라고 하자 아이가 곧바로 ‘장재식!’을 외쳤다. 장재식은 다름아닌 부서 팀장 이름…. “도대체 집에서도 회사일로 얼마나 통화를 많이 했으면 애 입에서 팀장 이름이 그렇게 쉽게 튀어 나오겠어요.”

서울의 한 컨설팅 회사에 다니는 최 과장은 맞벌이를 하느라 아들 둘을 친정과 시집에 따로 맡겼다. 문제는 친정은 대구, 시집은 광주에 있다는 것. 이 과장 부부야 주말마다 대구와 광주를 들러 아이들을 보고 오지만 정작 아이들끼리는 명절 때나 돼야 얼굴을 본다. “얼마 전 설에 오랜만에 다 같이 모였는데, 큰 애는 경상도 사투리를, 작은 애는 전라도 사투리를 쓰고 있더라고요. 내가 뭣 때문에 살고 있나 하는 회의가 들었어요.”

의류회사에서 일하는 진 과장은 지난주 오후 화장실에 갔다가 퉁퉁 부은 눈으로 사무실로 돌아왔다. 그가 하루에 두 번 정도 장시간 화장실에 가는 것은 지방에 있는 친정에 맡긴 딸과의 영상 통화 때문. 딸은 통화할 때마다 엄마 얼굴을 보면 대성통곡을 해 마음을 찢어놓는다. 그런데 지난주엔 영상통화를 하는데도 얼굴을 쳐다보지도 않고 별 관심조차 없더라는 것이다. “우는 모습보다 무관심한 게 더 슬프더라고요. 이러다 엄마 얼굴 다 잊는 건 아닌지 걱정이 돼요.”

◆“내가 아니라 어린이집이 문제예요…”

야근이 많은 대기업 정 과장은 요즘 ‘24시간 문구사’가 생겼으면 싶다. 퇴근하고 나면 동네 문구사는 문을 닫기 때문에 아이 준비물을 챙겨주는 게 쉽지 않다. 결국 낮 시간 회사 근처 문구사에 가서 준비물을 사뒀다가 몰래 회사로 갖고 들어온다고. “업무 시간에 애 준비물 챙기느냐고 혹시나 욕할까봐 늘 옷 속에 몰래 숨겨 들어와요. 준비물 크기가 크면 근처 지하철 역 보관함에 넣어놓고 오기도 하고요. 집 근처 편의점에서 준비물도 팔면 좋겠는데….”

세 살된 딸을 키우는 김 대리는 매일 10~20분씩 지각을 해 눈총을 받는다. ‘10분만 빨리 나오면 될 걸 왜 매일 늦느냐’고 주변에서 말하지만 문제는 김 대리가 아닌 어린이집 운영시간이다. “아무리 빨리 나와도 어린이집이 8시에 문을 열기 때문에 아이를 맡길 수가 없어요. 남편 출근은 저보다 빨라서 어쩔 수 없이 제가 늘 데려다 주는데 정말 회사에도 눈치 보이고 저도 아침마다 힘들고, 어린이집이 10분만 일찍 문을 열면 좋겠네요.”

◆그래도 ‘시월드’는 피하고 싶어

아이가 아무리 보고 싶어도 집에 가는 게 달갑지 않은 경우도 있다. 유치원생 아들을 키우는 고 대리도 웬만한 남자들보다 더 야근을 많이 한다. 회사에서 시키는 게 없으면 자진해서 일을 만들고, 일이 없으면 거래처와 일부러 저녁 약속을 잡는다. 시부모가 집에 와서 아이를 봐주기 때문이다. 아이는 챙겨주고 싶지만 저녁마다 반복되는 시부모의 참견과 잔소리 때문에 집으로 발걸음이 잘 떨어지지 않는다고 한다.

“처음엔 매일 아침 왔다가 저녁에 집으로 돌아가던 시부모님이 아예 집안에 둥지를 트셨어요. 아이는 정말 보고 싶지만 ‘시월드’는 그래도 피하고 싶은 걸 어떡하죠.”

정소람/고경봉/강영연/윤정현 기자 ram@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