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변동에 탄력적으로 대응하려면 사내하도급 활용이 불가피하다.”

국내 완성차업체 관계자는 4일 “우리나라처럼 고용유연성이 낮고 생산라인 전환배치가 쉽지 않은 곳에서는 정규직만으로는 공장을 돌릴 수 없다”며 이렇게 말했다.

새 정부 출범 직후부터 기업들이 사내하도급(업무대행)과 불법파견 사이에서 고민에 빠졌다. 기업들이 정당한 사내하도급이라고 주장해온 관행들이 법원 판결과 정부 점검 결과 잇따라 불법파견으로 결론났기 때문이다. 현대자동차와 한국GM 등 관련 기업들은 곤혹스러워하고 있다. 재계 관계자는 “경제민주화 바람 속에 재계의 노동유연성 강화 목소리는 파묻히고 비정규직 차별 철폐 등만 부각되는 것 같아 안타깝다”고 했다.

◆자동차·조선·철강업 사내하도급 많아

사내하도급은 1960~1970년대 중공업육성 정책 아래 조선과 철강업을 중심으로 시작됐다. 외환위기를 거치며 산업 전반과 공공기관으로 확산됐다. 사내하도급 근로자들은 원청업체 정규직과 같은 일을 하는데도 낮은 임금을 받는 등 처우가 좋지 않아 정규직화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았다.

고용 유연성이 상대적으로 떨어지는 우리나라는 사내하도급이 많은 편이다. 고용부가 2010년 근로자 300명 이상 사업장 1939곳을 조사한 결과 41.2%의 사업장에서 사내하도급을 활용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사내하도급 근로자는 전체 근로자의 24.6%인 32만6000명이었다.

업종별로는 조선업의 사내하도급 비율이 61.3%, 철강은 43.7%에 이른다. 자동차는 16.3%로 비율로만 보면 작다. 그런데도 조선·철강 등에서는 불법파견 문제가 크게 불거지지 않는 것은 하도급업체가 각기 다른 영역을 맡아 독립적으로 작업하기 때문이다. 이에 비해 자동차공장은 컨베이어벨트를 타고 흐르는 공정 특성상 정규직과 사내하도급 인력 간 업무를 분리하기 힘들다.

현대차는 지난해 비정규직 문제가 사회적 논란이 되자 올해 1750명을 포함해 2016년까지 3500여명을 정규직으로 채용하겠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사내하도급 노조(비정규직 지회)는 8500여명(회사 측 주장 6800여명) 전원을 정규직으로 전환해 달라고 요구, 갈등을 빚고 있다.

◆사내하도급 vs 불법파견

사내하도급 계약 자체는 불법이 아니다. 다만 도급계약인데도 파견근로자를 사용하는 것처럼 원청업체가 업무 지시와 근태관리 등을 하면 불법파견이 된다. 도급계약으로 위장한 파견계약이라는 얘기다. 유통업체 매장과 제조업 직접생산 업무에 파견받은 근로자를 투입하는 것은 불법이다.

이마트와 옛 GM대우(현 한국GM), 현대차 등에서 일부 근로자들의 신분이 논란이 된 것은 이들을 사내하도급으로 보느냐 파견근로로 보느냐의 판단이 달랐기 때문이다. 사내하도급과 파견을 구분하는 핵심 잣대는 ‘업무 지시와 감독 권한이 어디에 있느냐’와 ‘원청업체 정규직과 섞여 같이 일을 했느냐’다.

◆“파견범위 넓히고 고용유연성 보장”

기업들은 사내하도급과 불법파견을 포함한 비정규직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위해서는 ‘정규직 과보호’가 사라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고용유연성이 낮아 해고 등이 엄격하게 제한된 상황에서는 비정규직 문제 해법이 나올 수 없고 기업들의 부담만 늘어난다는 것이다.

이희범 한국경영자총협회 회장은 “비정규직 차별을 금지하는 내용의 기간제근로자보호법 개정안과 파견근로자보호법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는데 한쪽만 보고 너무 성급하게 몰아붙이는 느낌”이라며 “비정규직 문제는 고용유연성과 균형을 맞춰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미국 일본 등 다른 나라는 고용유연성을 강화해 나가는 추세인데 우리나라만 아닌 것 같다”고 지적했다.

박지순 고려대 법학과 교수는 “비정규직을 모두 정규직으로 전환하면 나중에 구조적 불황이 오면 전부 정리해고할 것이냐”며 “이렇게 되면 쌍용자동차 사태에서 보듯 사회·경제적으로 큰 불안이 올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파견업종 범위를 늘리는 등 기업이 다양한 인력운용을 할 수 있도록 제도적으로 뒷받침해야 한다”며 “기업들도 도급계약으로 위장한 불법파견을 통해 인력을 손쉽게 부리려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고 강조했다.

경총에 따르면 우리나라 비정규직 근로자는 모두 591만1000명(2012년 8월 기준). 이 중 70.4%가 30명 미만 영세기업 소속이다. 300명 이상 대기업의 비정규직은 전체의 5.2%에 불과하다.

미국, 캐나다, 호주, 영국, 독일(건설 제외) 등 15개국에서는 파견업종과 기간 제한이 없다.

이건호 기자 leek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