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로 한쪽에 시커먼 때가 묻은 채로 좀체 녹지 않을 것처럼 도사리고 있던 눈이 시나브로 자취를 감췄다. 낮에는 햇살이 제법 따사롭다. 갓 피어나는 새내기의 계절이다. 어린 학생들은 책가방을 메고 종알대며 학교에 갈 것이고, 대학에는 신입생들이 잔디밭에 앉아 노래라도 부를 때다. 새내기 직장인들은 선배들의 이런저런 지시에 종종대다가 점심을 먹으러 나와서 문득 봄이구나, 하고 느낄 것이다.

그런데 내 통장에도 봄볕이 들고 있을까. 새 출발을 하는 시기에는 지출이 크게 늘게 마련이다. 자녀의 학교 입학이든, 직장생활을 시작하든, 결혼하든, 아이가 새로 태어나든, 은퇴 후 제2의 삶을 시작하든 마찬가지다. 처음에 필요한 투자 성격의 비용이 있다. 기존 지출은 줄이지 못한 채로 새 지출항목까지 감당하려다 보면 어느새 통장은 텅텅 비어 있게 마련이다. 새내기 직장인들 가운데 의외로 마이너스 통장을 쓰는 이들이 많은 이유도 이런 것이다.

새로운 생활을 시작할 때 맨 처음에 짜놓은 자산관리 포트폴리오는 이후의 재무설계를 좌우한다. 밑그림을 잘 그리면 그것만 잘 따라 그려도 절반은 먹고 들어가는 셈이다. 특히 현재의 수입과 지출만 고려하기보다는 장기적으로 인생 전체를 두고 ‘생애 재무설계’를 짜겠다는 마음을 가질 필요가 있다. 50년 후의 내 모습까지 상상하며 살아야 한다는 얘기다. 급할 때 쓸 실탄(?) 따로 챙겨 놓고, 나머지 현금 수입 가운데 저축할 부분과 소비할 부분을 잘 가름해야 한다.

당장 1억원이 넘는 연봉을 받는다 하더라도 노후 준비를 하지 않은 채 9000만원 이상을 소비에 탕진한다면 연봉 3000만원의 평범한 월급쟁이만도 못한 노후를 맞을 수 있다. 연예인들이 일쑤 노후관리에 실패하는 것도 인기를 누릴 때 목돈을 벌지만 쉬이 써 버리는 습관이 생기는 탓이 크다. 생각보다 인생은 길다. 투자 성격의 지출에도 의미가 있겠지만, 불필요한 소비 습관이 들지 않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

특히 요즘 같은 저금리 환경에서는 ‘장기 적립(저축)’이 더 중시된다. 금리가 낮기 때문에 옛날처럼 연 10%, 20%씩 이자가 붙는 상품은 기대하기 어렵다. 금리가 연 20%쯤 된다면 적금을 부어서 약 6년 뒤엔 원금의 두 배를 돌려받을 수 있다. 하지만 현재 시중은행 정기예금 금리는 4일 기준 연 2.4~3.65%에 불과하다. 물가상승률 수준이거나 이에 못 미칠 수도 있다. 그렇다고 무리해서 높은 수익률을 얻으려 리스크가 큰 상품에 투자하는 것은 위험하다. 생애 재무설계를 통해 20년, 30년씩 길게 보고 원금을 착실히 불려나가는 수밖에 없다.


갈수록 비과세와 절세 혜택이 축소되거나 폐지되는 것도 미리미리 재무설계에 나서야 하는 이유 중 하나다. 소득공제 및 비과세 상품들이 잇달아 사라지는 중이다. 박근혜 정부도 추가 세금 없이 복지 수준을 높이려 하고 있기 때문에 추가 세원 발굴이 절실하다. 금융 관련 세금 혜택은 앞으로 더 찾아보기 어려울 전망이다.

그나마 월급쟁이들의 재산 형성에 도움을 주겠다며 6일부터 출시되는 ‘재형저축’이 이자소득세(14%)를 면제하는 수준이다. 농어촌특별세(1.4%)는 부과된다. 이런 절세형 금융상품에 대한 혜택이 다시 없어질 수도 있지만, 기존 가입자의 혜택까지 없애진 않기 때문에 계좌를 터서 소액이라도 가입해 두는 것이 유리하다. 예컨대 과거 장기주택마련저축에 1만원이라도 넣어둔 사람은 소득공제 혜택이 사라지긴 했지만 7년 이상 가입시 이자소득세 비과세 혜택은 계속 받을 수 있다.

하지만 신중해야 한다. 보험상품 같은 것을 잘못 들었다가 중도 해지하면 손해가 크다. 수수료(사업비)를 초기 납입비에서 떼는 구조여서, 가입한 지 몇 년 지나지 않아 해지한다고 하면 원금에서 일부밖에 돌려받지 못한다. 예금상품 등은 만기에 따라 돈이 묶일 수 있는 위험이 있으므로 여러 주머니(통장)를 굴려야 갑작스레 해지하더라도 손해를 덜 본다. 증권상품도 장기투자와 단기투자에 따라 수수료 체계와 투자대상을 달리 선택할 수 있다. 예컨대 브라질 채권에 투자한 뒤 1년 만에 돈을 빼는 것은 무의미하다. 환전세를 6%나 내야 하기 때문에 채권 이자(연 9% 수준)를 고려해도 환전에 드는 비용과 증권사 수수료 등을 빼고 나면 별 이익이 없다.

새 출발이 젊은이들만의 몫은 아니다. 은퇴자도 제2의 삶을 다시 시작하는 이들이다. 은퇴자들의 출발에는 더욱 더 많은 준비와 신중함이 요구된다. 20~30대 젊은이들은 대개 이제부터 현금 수입을 갖게 되지만, 은퇴자들은 이제부터 현금 흐름이 끊기는 시기이기 때문이다. 새로운 직장을 잡아서 소액이라도 돈을 벌 수 있다면 비교적 든든할 것이다. 추후 필요해질 병원비 간병비 등과 새로운 삶을 위한 투자자금 등에 대한 고려도 있어야 한다.

이상은 기자 sele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