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가 경제를 위기로 내몰고 있다.”

익명을 요구한 한 경제부처 고위 간부는 5일 “국민들은 지금과 같은 ‘무정부 상태’가 국가 경제에 얼마나 큰 손실을 안기고 있는지 잘 모를 것”이라며 이같이 말했다. 정부출범 지연에 따른 인사 공백, 예산배정 지연으로 인한 사업 차질, 정권 초기 경기부양 추진동력 상실 등 막대한 피해가 발생하고 있다는 것이다.


○공공기관 인사도 올스톱

국민 실생활에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는 공기업 경영도 적잖은 타격을 받고 있다. 이달 중 임기가 끝나는 공기업, 공공기관 기관장이나 감사, 상임 또는 비상임인사 등만 줄잡아 100명에 육박하지만 후임 인선 작업은 전혀 이뤄지지 않고 있다. 여기에는 이미 사퇴한 이채욱 인천국제공항공사 사장과 청와대에 사표를 제출한 전광우 국민연금관리공단 이사장 후임도 포함돼 있다.

공기업 주요 인사는 매달 한 번 재정부 2차관이 주재하는 공공기관 운영위원회에서 결정된다. 여기서 후임자를 3~5배수로 압축해 청와대 인사위원회에 올려야 하지만 위원회 자체가 열릴 기미가 없다. 기획재정부 관계자는 “당사자들의 임기 만료 전에 각 기관별로 인사추천위원회를 구성해 인선 작업을 진행해야 하지만 청와대에서 구체적인 지침을 내려보내지 않아 손을 쓸 수 없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한 에너지 공기업 관계자는 “승진이 안 된 고위 공직자가 산하기관으로 옮겨가고 과거에 임명된 낙하산 인사까지 정리되려면 한동안 어수선한 상태가 이어질 것”이라고 말했다.

인사가 지연되면서 발등의 불로 떨어진 공기업 재무구조 개선 등 새 정부가 추진키로 한 각종 개혁과제도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다.

○신설부처 예산배정, 사업시행 ‘감감’

신설되는 해양수산부로 옮겨가게 될 국토해양부의 해양 부문은 일손을 놓은 지 오래다. 내부적으로 해수부를 3실·3국·9관·41과 체제로 출범시킨다는 계획만 있을 뿐이다. 예산배정이나 사업시행 등은 생각조차 할 수 없다. 여수엑스포장을 해양관광특구로 지정하거나 해운업계 유동성 지원을 위해 매년 1000억원 정도의 해운 보증기금과 선박금융공사를 설립하겠다는 방안도 완전히 겉돌고 있다.

미래창조과학부로 대부분 업무가 이관되는 방송통신위원회는 ‘유령부처’로 전락했다. 특히 방송정책 업무가 올스톱되면서 당초 7일로 예정됐던 방통위 전체회의도 취소됐다. 방통위 관계자는 “어떤 업무가 미래부로 넘어가고 방통위에 남게 될지 조정이 안된 상황에서 위원회에 안건을 올릴 수 있겠느냐”고 말했다.

이동통신용 주파수 경매와 케이블방송(SO) 지상파 재송신 제도, 안테나 없는 위성방송(DCS) 도입 등 현안도 논의 자체가 중단됐다.

미래부로 상당 부분 조직이 옮겨갈 교육과학기술부도 김종훈 장관 후보자의 돌발 사퇴로 ‘멘붕’ 상태다. 이근재 기초연구정책관은 “과학 분야의 경우 올해 예산 확보에 실패한 과학비즈니스벨트 부지 조성과 박근혜 대통령이 개발 시기를 앞당기겠다고 발표한 한국형발사체 등 핵심 사업은 예산 확보에 어려움을 겪을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대학으로 가는 연구·개발(R&D) 예산 중 지난해 사업이 종료된 BK21과 연구중심대학(WCU) 등의 후속 사업에도 막대한 차질이 예상된다.

○재정부 ‘선(先)보고 후(後)결재’

금융위원장에 내정된 신제윤 재정부 1차관은 4일 직원들에게 편지를 보내 “내정자 신분이지만 현오석 부총리에게 수시로 보고하고 상의 후에 정책을 추진해주기 바란다”고 지시했다.

재정부의 한 간부는 “부총리 임명 전까지 ‘선보고 후결재’ 방식으로 일을 진행하라는 지침으로 해석하고 있다”고 말했다. 현 후보자가 부총리 신분이 아니어서 권한과 책임에 한계가 있지만 더 이상 일을 미뤄서는 안 될 시점인 만큼 편법으로라도 일을 진행하라는 것이다.

하지만 재정부 예산실 관계자는 “내달 청와대에서 대통령 주재하에 자원배분회의나 재정전략회의를 열 준비를 해야 하는데 인사장벽에 막혀 아무 것도 하지 못하고 있다”고 말했다. 장·차관은 물론 1급 고위직 인사에서부터 과장들까지 교체 대상이어서 책임감을 갖고 일을 하기도 어렵다.

일부 전문가들은 글로벌 경제위기가 언제 어떤 형태로 엄습할지 모르는 상황에서 정부 부처의 업무 공백이 장기화될 경우 자칫 국가신용등급에 영향을 주는 최악의 상황이 발생할 수도 있다고 우려하고 있다.

이심기/김진수/조미현/김태훈 기자 sgle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