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기유학·어학연수·교환학생. 과연 필요한지, 효과는 있는지, 왜 누구는 가고 누구는 못가는지 말 많은 우리 교육의 단면이다. 이를 둘러싼 논란은 한국만의 일일까. 그렇지 않다. 외국, 그것도 유럽의 근대가 태동할 때부터 있었던 일이다. 17세기 후반 종교분쟁이 가라앉고 교역을 통해 강대국으로 떠오른 영국의 상류층은 자식들을 유럽 대륙으로 보내 외국 문화와 언어, 상류층의 매너와 취향을 배워오게 했다. 당시에도 이런 여행이 필요한지, 쓸데없는 낭비인지, 자식을 망치는 일인지에 대한 논쟁은 끊이지 않았다.

유럽인들은 이 여행을 ‘그랜드 투어’라고 불렀다. 어린 청년이 교육의 일환으로 프랑스와 이탈리아 등에서 2~3년씩 체류하던 ‘대여행’이었다. 설혜심 연세대 사학과 교수는 신간 《그랜드 투어》에서 이 여행의 시작과 전개, 내용을 소개하고 이를 둘러싼 논란과 현재까지 이어져오는 역사를 짚는다.

저자는 이 책을 ‘대중 교양서’라 소개한다. “네 책은 너무 어려워서 읽을 수가 없다”는 모친의 말에 충격을 받은 뒤 ‘작정하고’ 쉽게 쓴 책이다. 그런 만큼 구조나 인과관계에 기대 학술적으로 전개하는 방식을 지양하고 ‘이야기’로서의 역사를 조곤조곤 들려준다. 예나 지금이나 다를 것 없는 부모의 자식 걱정과 유학의 장단점에 대한 논란, 이 여행이 유럽의 통합과 문화에 미친 영향 등 흥미로운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다보면 근대의 유럽을 여행하는 듯한 느낌이다. 물론 이런 편안한 전개가 가능한 건 이 책이 그만큼 노작(勞作)이기 때문. 저자는 7년간 쉽게 찾을 수 없는 편지와 메모 등 자료를 모으며 집필을 준비했다.

그랜드 투어는 여행자들의 견문을 넓히고 그들에게 영감을 줬다. 스코틀랜드의 작가 지망생 제임스 보즈웰은 1764년 장 자크 루소를 만나 음악과 사랑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며 대문호의 꿈을 키웠고, 귀족 자제의 동행 교사로 여행했던 애덤 스미스는 데이비드 흄과 교류했다. 그가 ‘국부론’을 그랜드 투어 도중 썼다는 건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다. 존 밀턴은 1638년부터 2년 동안 이탈리아에 머물렀는데, 그곳에서 벌였던 문학적 토론은 ‘실락원’의 토대가 됐다. 몽테스키외도 영국 여행의 경험이 ‘법의 정신’ 저술에 큰 영향을 끼쳤다고 말했다.

물론 논란도 있었다. 그랜드 투어에는 매년 3000~4000파운드, 현재 가치로 약 4만파운드(약 6500만원)라는 큰돈이 들었다. 막대한 비용에다 질병과 범죄의 위험을 무릅쓰면서까지 가야 하는지에 대한 논란, 피상적인 구경일 뿐이라는 지적, 성적으로 문란해져 돌아온다는 우려가 끊이지 않았다.

논쟁에도 불구하고 그랜드 투어는 유럽 통합에 큰 영향을 미쳤다. 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젊은이들은 ‘하나의 유럽’이라는 코스모폴리탄적 사고를 가지게 됐다. 투어와 함께 ‘유럽의 소문’ ‘유럽의 지식인들’처럼 유럽을 하나의 단위로 삼은 잡지나 인쇄물도 갑자기 늘었다. ‘그랜드 투어리스트’였던 몽테스키외는 유럽은 ‘고유의 역사와 독특성을 지닌 문화적·정치적·지적 통합체’라고 정의했다. 오늘의 유럽연합을 낳은 주춧돌은 다름 아닌 그랜드 투어였던 셈이다.

귀족들의 전유물이었던 그랜드 투어는 철도와 증기선의 발달로 서서히 대중화됐고, 시간이 흘러 오늘날의 어학연수나 교환학생 제도로 이어졌다. 그랜드 투어가 형태를 바꿔 지금까지 흘러온 건 그 밑바탕에 ‘다른 세계에 대한 호기심’이라는 여행의 변치 않는 가치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랜드 투어라는 한 부분으로 여행의 역사 전체를 생각하게 하는 매력적인 책이다.

박한신 기자 hanshi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