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가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 아직 기억력은 괜찮지만 또 책을 쓸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85세이던 2009년 통신보안시스템 분야 글로벌 베스트셀러인 모바일 커뮤니케이션 시스템과 보안을 단독 출판해 화제가 됐던 암호학 분야의 세계적 석학인 이만영 박사(경희대 석좌교수)가 20일 별세했다. 향년 89세.

‘한국 암호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이 박사는 1962년 한국 최초 아날로그 컴퓨터를 만들었다. 1972년 서강대 풀브라이트 교수로 재직할 당시 전자공학과 70학번인 박근혜 대통령을 가르쳤다. 이때의 인연으로 박정희 전 대통령으로부터 요청을 받고 1975년 국방과학연구소 초대 부소장을 맡아 지대지유도탄 개발에도 참여했다.

1924년 경기 광주에서 태어난 이 박사는 1952년 서울대 전기공학과를 졸업하고 미국으로 건너갔다. 콜로라도대에서 석·박사를 마치고 버지니아주립대 공대 교수를 지냈다. 박 전 대통령의 요청으로 한국으로 돌아온 이 박사는 국방과학연구소를 거쳐 한국전자통신 초대 사장을 맡아 전화 전자교환기 개발을 주도했다.

이후 1980년 삼성반도체통신(1988년 삼성전자로 합병) 대표이사를 거쳐 1981년 한양대 교수로 자리를 옮기면서 학문연구에 매진했다. 1990년 한국정보보호학회를 설립해 1~4대 회장을 맡았고 한국정보보호진흥원 초대 이사장을 지냈다. 경희대에는 2003년 첫 석좌교수로 갔다.

통계통신공학 신호분석론 등 10여권의 보안 관련 책을 쓴 이 박사는 해외에서도 5권의 책을 냈다. 영문서적들은 모두 정보보안 부문 베스트셀러가 됐다. 1997년 출간한 CDMA 네트워크 보안은 일본어와 중국어로도 번역돼 암호학 분야의 ‘바이블’로 통한다. 원동호 성균관대 교수, 오희국 한양대 교수 등 이 그의 제자들이다.

그는 올 1월 펴낸 자서전 ‘내가 가는 방향이 곧 길이다’(휴먼큐브 펴냄)에서 박 대통령과의 첫 만남 등 각별했던 인연도 소개했다. “(서강대) 전자공학과에서 강의를 한 지 몇 주 지난 후 강의가 끝나고 연구실로 돌아와 있는데 누가 노크를 했다. 43명 중 딱 한 명 있는 여학생이었다. (중략) 무슨 일이냐고 묻자 ‘다음 금요일 저녁에 어머니가 교수님을 저녁에 초대해 식사를 같이하자고 말씀하시면서 시간이 되시나 여쭤보라고 하셔서 제가 왔습니다’라고 답했다. (중략) 학생에게 그날 한전 부사장과 선약이 있다고 하자 학생은 어머니께 그렇게 말씀드리겠다고 한 뒤 헤어졌다.” 고인은 또 “박근혜 대통령은 왜 여자들이 잘 선택하지 않는 공과 중에서도 어려운 전자공학을 택했을까”라면서 “박정희 대통령의 지론에 따른 듯하다”고 적었다.

1983년 국민훈장 동백장과 대한전자공학회 학술상, 한국통신학회 학술상(1989), 한국공학한림원 대상(1998), 국민훈장 무궁화장(2000) 등을 받았다. 1995년부터 한국과학기술한림원 종신회원, 1997년 이후 한국공학한림원 원로회원, 2000년부터는 대한민국학술원 회원을 지냈다.

유족은 부인 김옥나 씨와 아들 종훈(재미 사업) 정훈(한양대 교수), 딸 주훈 씨가 있다. 빈소는 삼성서울병원, 발인은 22일 오전 8시. 02-3410-6915

백승현 기자 argo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