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은 물론 세계 경제의 불안 요소였던 키프로스 사태가 한고비를 넘겼다. 유로존(유로화 사용 17개국) 재무장관들과 유럽연합(EU), 국제통화기금(IMF), 유럽중앙은행(ECB) 등 채권단 ‘트로이카’ 대표들은 24일(현지시간) 저녁부터 25일 새벽까지 이어지는 키프로스 정부와의 마라톤 협상 끝에 구제금융 집행에 합의했다. 트로이카가 100억유로(약 14조4000억원)의 구제금융을 주는 대신 키프로스는 자국 은행을 구조조정해야 한다는 조건이 붙었다.

파이낸셜타임스(FT)는 “키프로스 양대 은행의 구조조정 과정에서 10만유로 이상 고액 예금자와 주식·채권보유자는 자산의 20~40% 정도를 잃게 될 것”으로 전망했다.

○10만유로 이상 예금자 손실

유로존 재무장관회의체인 유로그룹이 25일 발표한 합의문에 따르면 키프로스는 구제금융 대가로 자국 1, 2위 은행을 구조조정해야 한다. 2위인 라이키은행은 굿뱅크와 배드뱅크로 분리된다. 배드뱅크가 자산을 처분하는 과정에서 10만유로 이상 예금자와 주식·채권 보유자는 상당한 손실을 보게 된다. 10만유로 미만 예금자 예금 등이 포함된 굿뱅크의 자산은 1위인 키프로스은행으로 넘어간다.

키프로스은행도 구조조정을 해야 한다. 10만유로 이상 예금자의 예금 중 일부 또는 전부가 주식으로 전환된다. 키프로스은행은 주식·채권 보유자에게도 손실을 부담시킬 예정이다. ECB는 키프로스은행의 구조조정을 지원하기 위해 구제금융과는 별도로 긴급유동성지원프로그램(ELA)을 통해 90억유로를 투입하기로 했다. 대신 구제금융 100억유로는 은행 구조조정에 쓸 수 없다. 키프로스는 은행 구조조정 과정의 고액 예금자 손실 부담 등을 통해 국가 채무를 갚는 데 필요한 70억유로를 만들어야 한다.

○단기 호재 … 후유증 우려

키프로스가 구제금융을 받게 되면서 디폴트(채무 불이행)는 피할 수 있다. 키프로스 사태가 일단 진정 국면에 접어들었다는 소식에 이날 코스피지수는 1.49% 상승했고 닛케이225지수는 1.69% 올랐다. 그러나 몇 가지 문제점과 후유증이 남는다.

우선 유럽 제1의 경제 대국인 독일의 리더십은 큰 상처를 받았다. 독일은 당초 EU가 정한 10만유로 미만 예금자 보호 원칙을 깨고 키프로스 예금자 전부에게 부담금을 부과하는 방안을 제시했다. 비난이 거세지자 다시 10만유로 미만 예금에는 손을 대지 않겠다고 말을 바꿨다. ‘양치기 소년’이 된 셈이다.

유로그룹이 키프로스 2개 은행을 구조조정하면서 후순위는 물론 선순위 채권자들까지 손실을 볼 수 있도록 합의한 것도 이례적이다. 유로존 국가가 구제금융을 받는 조건으로 선순위 채권자까지 피해를 보게 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이 때문에 유로존 은행권이 신뢰를 잃을 가능성도 있다.

은행 구조조정이 키프로스 경제에 장기적으로 나쁜 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구조조정이 끝나면 막대한 손실을 본 예금자들이 키프로스 은행을 떠날 것은 불 보듯 뻔하다. FT에 따르면 키프로스에 계좌를 가진 러시아 올리가르히(재벌)들은 벌써부터 라트비아, 스위스, 독일 은행에서 ‘러브콜’을 받고 있다. 키프로스 대신 낮은 세율로 자산을 유치해 주겠다는 것이다.

키프로스에 자산을 갖고 있는 러시아 사업가 표도르 미힌은 “러시아 돈이 떠나면 키프로스에서 식당을 가고 차를 사고 물건을 사는 사람들도 크게 줄어들 것”이라며 “키프로스는 생계 수단을 잃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남윤선 기자 inklings@hankyung.com

■ 배드뱅크

금융회사의 대출채권 등 부실자산 처리를 전문으로 하는 회사. 은행에 부실채권이 발생한 경우 은행이 단독으로 또는 정부기관 등과 공동으로 배드뱅크를 설립한다. 배드뱅크는 부실채권이나 자산을 넘겨받아 정리하는 업무를 맡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