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에게 두 덩이의 빵이 있으면 하나를 팔아 장미꽃을 사시오.’

이슬람 경전 속 어느 현자가 한 말이 문득 떠오르는 요즈음이다. 빵은 육체를 자라게 하나 꽃은 마음을 키우는 것이니.

새 정부가 출범한 지 한 달이 지났다. 새로이 일꾼들을 뽑는 과정에서 잡음과 우여곡절이 많았지만 그 와중에도 선거 때 내걸었던 공약을 실행하기 위한 구체적인 정책들이 속속 발표되고 있다. 공약들이 모두 실현되기는 어렵겠지만 적어도 복지 분야에서는 괄목할 만한 변화가 있을 것으로 보인다.

사실 복지의 개념은 수혜자의 입장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어서 아픈 사람에겐 의료제도가, 가난한 이에겐 현금이 복지로 느껴질 것이다. 크게 보자면 국민 개개인이 삶 속에서 행복감을 느낄 수 있는 최소한의 조건을 충족해주는 제도가 복지일 것이다. 과도한 업무에 지친 복지담당 공무원의 자살이 잇따르는 걸 보면 이 무슨 아이러니인가 싶기도 하지만.

그런 한편, 문화와 예술 쪽에 관한 공약은 이번에도 여전히 들려오지 않았다. 폭포처럼 쏟아지는 정책들 중에서도 예술 분야에 관한 한 의욕적인 정책은 눈에 띄질 않는다. 특별히 기대하지도 않았지만 실망스럽지 않은 건 아니다. 나 개인적으로는 열 살 때 시작된 새마을 운동의 한가운데서 성장한 셈이다. 아침이면 행진곡풍의 ‘새벽종이 울렸네’로 시작되는 확성기 노래에 눈을 떴다. 전후의 폐허를 가까스로 지나 빈곤의 평준화 속에서 살던 당시를 생각해보면 먹고사는 일 외에 또 다른 일을 꿈꾸는 것은 사치였고 허튼짓이었으나 세기가 바뀌면서 삶의 패러다임은 급격하게 변화했다. 국내총생산(GDP)만이 선진국과 후진국을 가르는 기준이 되던 시절이 지난 지 오래다. 세계는 이제 문화전쟁을 치열하게 치르고 있는데 우리의 문화예술 홀대정책만은 굳건하게 바뀌지 않고 있다.

운동을 좋아하지 않아 스포츠 방송은 잘 보지 않지만 올림픽의 개·폐막식은 챙겨보는 편이다. 주최 측이 심혈을 기울여 준비한 그 행사에는 개최국의 문화와 역사, 예술적 역량이 잘 드러나 있기 때문이다. 나로선 지난해, 영화 트레인스포팅의 감독 대니 보일이 연출한 런던 올림픽이 충격적이었다. 어쩐지 점잖은 노인들의 담소처럼 지루할 것 같다는 내 짐작이 무식의 소치라는 걸 깨닫는 데는 시간이 얼마 걸리지 않았다. 롤링 스톤스, 조지 마이클, 프레디 머큐리 같은 기라성 같은 가수들의 무대뿐이었다면 그렇게 배가 아프진 않았을 것이다. 산업혁명과 찰스 디킨스와 셰익스피어와 윌리엄 블레이크까지 나왔을 때 ‘졌다’는 느낌과 진한 부러움이 뒤섞였다. 이제는 쇠퇴한 대영제국의 이미지 뒤에 이토록 창의적인 문화적 다양성이 있었구나. 전 세계가 감탄하며 그 멋진 영상을 지켜보았을 것이다. 장이머우 감독이 총감독했던 베이징 올림픽은 전통문화에 기반을 둔 강렬한 시각효과와 거대한 스케일로 기억에 남아있는데 런던과 비교하면 역시 콘텐츠에서 밀린다는 느낌이다.

누군가는 냉소적으로 그렇게 말한다. 언제는 우리 문화가 국가 차원의 지원을 받아 꽃 피웠던가? 조수미, 싸이, 김연아가 그렇듯 개인의 탁월한 재능에 기반한 각개전투의 결과지. 세계적인 작곡가로 활동하고 있는 진은숙을 베를린에서 만나 어떻게 낯선 곳에서 이런 성취를 이루었나 물어보았을 때 그녀는 말했다. “자신에게 재능만 있다면, 성공하지 않기가 어려운 곳이 독일입니다.” 문화 예술 분야에 관한 독일 사회의 전폭적 지지를 짐작해볼 수 있는 말이었다.

예술 쪽 투자의 가시적 효과를 하루아침에 기대하기는 어렵다. 수치로 측량할 순 없지만 예술은 한 사회의 무의식을 담당하고 있다. 이 무의식이 망가지거나 제대로 작동하지 않으면, 사회 전체가 아프게 된다. 우리 사회도 더 늦기 전에 예술의 못자리를 만들고 매일매일 물을 주어야 한다.

꽃보다 빵이 중요한 건 말할 필요도 없지만, 사실 장미꽃이 가장 필요한 때는 우리가 삶의 고통스러운 시간을 지날 때이다.

정미경 < 소설가 mkjung301@hanmail.net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