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관을 물려받은 새끼 돼지가/할아버지처럼 살찌는 약을 먹고 군부대를 시찰하는데/배고픈 염소들이 담을 넘어올까, 두려운/이웃 농장의 여우들이 식량지원을 약속하고//돼지가 죽은 줄도 몰랐던 남쪽 나라에서는/두더지들이 황급히 머리를 맞대고/돼지의 죽음이 우리에게/이로울까?/해로울까?’(‘돼지의 죽음’ 부분)
솔직함의 대명사로 불리는 시인은 “전작 ‘도착하지 않은 삶’은 내가 낸 시집 중 유일하게 연애를 하지 않을 때 썼다”면서 “이번 시집의 작품들은 연애의 세계로 복귀해 쓴 시들”이라고 설명했다. ‘그대에게 보이고 싶지 않은/옛날을 도려낸다/편지를 태우고/사진을 찢고/옛날 남자들을 지우고/그 남자 옆에 서 있던 젊은 날의 나도 지우고/(…)/남자에게 나를 이해시키려/오래된 얼굴들을 다시 불러온다.’(‘의식’ 부분)
그의 시는 직접적이고 냉소적이라고 평가받지만 시인은 이를 반박했다. 경험에서 나온 비유를 주로 쓰기 때문에 ‘상징’들이 보이지 않게 시 속에 녹아 있고, 그래서 직접적인 것처럼 보인다는 얘기다.
첫 시집 ‘서른, 잔치는 끝났다’ 발표 후 항상 ‘386시인’으로 불려 온 데 대해서는 “386이니 후일담이니 하는 단어에 거부감을 느낀다”고 말했다. 많은 주제의 글을 써왔지만 1980년대에 관한 글은 쓰지 않았다고 했다. 그 시대의 의미를 아직 모르고 정리할 수도 없다는 게 이유다. 하지만 최근 생각에 변화가 생겼다. 문예지 ‘문학의 오늘’ 여름호부터 1980년대를 배경으로 한 자전적 성장소설을 연재하기로 한 것. 2005년 낸 첫 소설 ‘흉터와 무늬’에 이은 두 번째 소설이다.
“저의 20대를 소설화하는 셈이죠. 예전에 ‘우리 386세대의 명암과 1980년대의 아픔을 그려달라’며 독자가 편지를 보내온 적이 있어요. 거기에 대한 늦은 답장입니다.”
박한신 기자 hanshi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