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머런 매킨토시가 제작한 영국 뮤지컬 ‘레 미제라블’은 새삼 설명할 필요가 없는 명작이다. 자유 박애 평등의 보편적인 메시지를 수준 높은 무대예술로 전달하는 이 작품은 1985년 런던에서 초연한 이후 세계 43개국에서 21개 언어로 공연돼 6000만명이 관람했다. ‘세계를 울린 뮤지컬’이란 명성은 지난해 12월 개봉된 휴 잭맨 주연의 영화로도 입증됐다. ‘레 미제라블’ 신드롬을 일으킬 만큼 영화가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빅토르 위고의 대하소설과 뮤지컬 원작의 빼어남 덕분이다.

한국 배우들이 한국어로 부르는 뮤지컬이 ‘레 미제라블’ 열풍을 이어갈 수 있을까. 지난해 11월 경기 용인에서 시작된 한국어 공연이 대구 부산을 거쳐 지난 6일 서울에 입성했다. 국내에 처음 선보이는 ‘레 미제라블’ 25주년 개정판(2010년 초연)이자 첫 한국어 라이선스 공연이다. 1996년과 2002년 국내 공연은 트래버 넌 연출의 오리지널 버전이었다.

오리지널 버전의 깊이 있고 입체적인 무대 연출을 기억하는 뮤지컬 팬이라면 새 버전에 실망할 수 있다. ‘레 미제라블’ 의 독창적인 미학을 상징하던 회전 무대와 단순하고 현대적인 미니멀리즘식 무대가 사라졌다. 회전하는 무대를 중심으로 역동적으로 이뤄지던 장면 전환은 사실적인 무대 세트의 빈번한 드나듦과 영상 기법 등으로 대체됐다.

회전 무대를 사용하지 않은 바리케이드 전투 장면은 오리지널에 비해 평면적이고 밋밋했다. 최고의 뮤지컬 명곡으로 꼽히는 에포닌의 ‘나 홀로’ 장면은 안타까울 정도로 초라해졌다. 무대 뒤편부터 가로등 불빛 사이로 걸어 나오며 부르는 에포닌의 모습과 노래에 쏙 빠지게 하던 깊이 있는 공간 연출은 온데간데없다. 에포닌을 무대 앞으로 밀어 넣고, 중간 막을 친 후 배경 세트를 전환한다. 절절한 짝사랑의 아픔에 집중해야 할 시간에 세트가 이동하면서 끌리는 소음마저 들린다.

새 버전은 오리지널보다 20분가량 짧다. 그만큼 무대 전환이 신속하다. 하지만 얻은 것보다 잃은 게 더 많아 보인다. 위고가 직접 그렸다는 스케치를 따 온 배경 그림과 최신 영상 기법을 활용한 연출은 인상적이지만 독창적이지 않다. 라이선스 공연의 관건인 번역과 가사 전달도 썩 만족스럽지 않다. 합창과 테나르디에 등 일부 배역의 가사가 잘 들리지 않고, 번역투의 어색함이 곳곳에 남아있다. 첫 부분 ‘look down’을 ‘고개 숙여’가 아닌 ‘낮춰 낮춰’로 부르는 게 대표적이다.

매킨토시가 직접 선발했다는 주역들의 열연이 그나마 오리지널 무대의 향수를 달래준다. 장발장 역을 맡은 정성화의 연기가 단연 돋보인다. 정성화만큼 진성이 아닌 가성으로도 장발장의 감정 떨림을 표현하는 배우는 세계 어디서도 보기 드물다. 문종원은 묵직한 성악톤으로 자베르의 강렬함을 표현했다. 장발장에 비견할 만한 존재감을 드러내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한국 배우들이 오리지널 버전과 만났으면 우리말로 전해지는 ‘레 미제라블’의 감동이 훨씬 더 커졌을 것이란 아쉬움이 남는다. 공연은 한남동 블루스퀘어에서 종료 기한을 정하지 않은 ‘오픈런’ 방식으로 진행된다. 5만~13만원.

송태형 기자 toughlb@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