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릿느릿한 스윙, 무표정한 얼굴. 박인비(25)는 외모와 샷 등에서 화려함과는 거리가 먼 선수다. 이 때문에 실력에 걸맞은 대접을 받지 못했다. 지난해 미국 LPGA투어에서 상금왕과 최소타수상 등 2관왕을 석권하는 등 한국 선수 중 최고의 성적을 냈지만 그는 올 시즌 메인 스폰서를 구하는 데 실패했다. 국내의 한 금융그룹과 의견이 오갔으나 성사되지 못했고 한 외식프랜차이즈업체로부터 ‘러브콜’을 받았으나 막판에 무산됐다. 올해도 지난해와 마찬가지로 골프용품 스폰서인 일본 던롭스릭슨과 계약을 맺고 시즌을 시작하는 그의 마음이 편할 리 없었다.

박인비는 메인 스폰서를 찾지 못한 설움을 올 시즌 첫 메이저대회인 나비스코챔피언십(총상금 200만달러) 우승으로 날려버렸다. 그는 8일(한국시간) 캘리포니아주 란초 미라지의 미션힐스CC(파72·6738야드)에서 열린 대회 마지막날 버디 6개와 보기 3개로 3언더파 69타를 쳐 최종합계 15언더파 273타로 유소연(하나금융그룹)을 4타차로 따돌렸다. 2008년 US여자오픈에 이어 두 번째 메이저 우승이며 시즌 2승째(통산 5승)다. 우승상금은 30만달러.

박인비는 시즌 초반 2승을 거둬 올해의 선수상, 상금왕, 최소타수상 등 경쟁에서 유리한 고지를 점했다. 여기에 세계랭킹도 4위에서 2위로 뛰어올라 생애 첫 ‘넘버 원’ 등극도 바라보게 됐다. 박인비는 “이번 우승이 내 스윙과 퍼팅에 많은 자신감을 안겨줬다. 모든 것이 원하는 방향으로 가고 있다”며 “한 번도 못 받은 ‘올해의 선수상’을 받고 싶다”고 말했다.

박인비는 일본의 미야자토 아이와 함께 대표적인 ‘슬로 스윙’ 선수다. 천천히 들어올렸다가 가볍게 내리치는 듯하지만 샷이 매우 정확하다. 신지애(미래에셋)는 자신이 라운드 도중 동반자의 스윙을 보는 경우는 박인비와 미야자토 둘뿐이라고 했다. 빠른 스윙을 보면 자신의 스윙도 빨라지지만 느린 스윙은 리듬을 좋게 만든다고 한다. 유소연은 박인비의 퍼팅 실력에 대해 “(박)인비 언니와 10달러 내기를 하면 매번 50달러를 잃는다. 언니는 어려운 2.5m나 5m 파퍼팅을 항상 성공시킨다”고 말했다.

이날도 박인비의 ‘슬로 샷’은 컴퓨터처럼 정확했고 자로 잰 듯한 ‘송곳 퍼팅’의 위력은 눈부셨다. 6번홀(파4)에서 드라이버샷이 갑작스런 돌풍에 밀려 왼쪽 해저드에 빠지고 10번홀(파4)에서 벙커에 들어간 것을 빼고는 거의 실수가 없었다.

1번홀(파4)에서 8m 훅라인 버디퍼팅을 떨군 박인비는 2번홀(파5)에서 2m 버디를 추가했다. 8번홀(파3)에서는 8m가 넘는 슬라이스 라인 버디 퍼팅을 집어넣었다. 그가 그린에서 볼을 굴리면 모두 홀로 사라질 것만 같았다. 9번홀(파5)에서 환상적인 어프로치샷으로 1m 버디를 추가할 때는 5타차 선두였다.

12번홀(파4)에서 6m 내리막 버디 퍼팅에 이어 13번홀(파4)에서 3m 버디를 성공시켜 합계 16언더파가 됐을 때는 우승 여부보다 1999년 도티 페퍼(미국)가 세운 72홀 최소타 기록(19언더파) 경신이 관심사였다.

그러나 14번홀(파3)에서 3m 버디 퍼트가 홀을 돌아나오면서 집중력이 흐트러졌다. 15번홀에서 2.5m 버디를 놓쳤고 17번홀(파3)에서는 3퍼트로 보기를 범한 뒤 18번홀에서 3m 버디를 실패했다.

박인비는 “우승을 하기 위해서는 100야드 안의 샷과 30야드 이내의 쇼트게임이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이 부분을 전지훈련 때 중점적으로 연습했다. 이러한 점이 올 시즌 좋은 성적으로 이어지고 있는 것 같다”고 자평했다.

한국 선수들은 유선영에 이어 2년 연속 18번홀 그린 옆 ‘포피스 연못’에 빠지는 우승 세리머니를 펼쳤다. 이 세리머니는 1988년 에이미 앨코트가 우승한 뒤 연못에 몸을 던진 이후 전통이 됐다. 연못의 이름은 1994년부터 2008년까지 대회 진행 총책임자였던 테리 윌콕스가 자신의 손주 이름(포피)을 붙여 부르면서 유래했다.

한국 선수의 메이저 우승컵은 이번이 15번째다. 한국은 또 올 시즌 6개 대회에서 3승을 거두는 강세를 이어갔다. ‘톱10’에 한국 선수 5명이 들었다. 유소연은 이날 보기 없이 버디 7개를 잡아 ‘데일리 베스트’인 7언더파 65타를 몰아쳐 합계 11언더파로 준우승을 차지했다. 강혜지(한화)는 합계 6언더파로 캐리 웹(호주)과 공동 5위에 올랐다. 신지애는 합계 5언더파로 박희영(하나금융그룹) 등과 공동 7위에 자리했다.

박세리(KDB금융그룹)는 합계 3언더파 공동 19위, 최나연(SK텔레콤)은 합계 1언더파로 공동 32위에 머물렀다.

한은구 기자 toha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