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석이 번역한 1940년판 '테스' 햇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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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동호 교수 작년 8월 발굴…고증작업 후 복간
"'테스' 번역은 일제 대동아주의 탈피 시도한 것"
"'테스' 번역은 일제 대동아주의 탈피 시도한 것"
시인 백석(1912~1996·사진)이 번역한 영국 고전 소설 ‘테스’의 1940년 조광사 판본이 9일 공개됐다. 당시 만주 지역을 방랑하던 백석이 ‘테스’를 번역하기 위해 서울을 다녀갔다는 기록은 있었으나 번역본이 사라져 연구하지 못하던 것을 최동호 고려대 국문과 교수가 지난해 8월 발굴, 복간해 이날 공개했다.
최 교수는 서울 인사동의 한 음식점에서 기자간담회를 열고 “중국이나 북한 쪽에서나 자료를 구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서울 한복판에 있는 걸 확인하고 ‘등잔 밑이 어둡다’는 말을 실감했다”고 말했다. 최 교수는 국내 모든 도서관의 자료를 뒤지고 중국에까지 연락을 하던 중 서강대 로욜라도서관에서 이 판본을 찾아냈다. 이후 방민호(서울대)·최유찬(연세대) 교수와 함께 복간을 준비했다.
백석이 번역한 판본은 ‘테스’의 국내 첫 번역서다. 19세기에서 20세기로의 전환을 알리는 소설로 평가받는 ‘테스’는 당시 일본 대학의 영문과에서 필수 강독 작품으로 꼽힐 정도로 인기가 높았다. 유성호 한양대 국문과 교수는 “백석 또한 일본의 아오야마가쿠인에서 공부하던 시기에 ‘테스’를 접했고 이를 국내에 소개했던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조선일보 기자로 일하던 백석은 1939년 조선일보가 폐간되면서 분리된 출판사인 ‘조광사’에서 이 소설을 번역 출판했다. 최 교수가 발굴한 원본은 표지가 사라진 상태지만, 뒷면에 ‘조광사 1940년 9월 30일’이라는 간기와 당시 사장이었던 ‘발행인 방응모’라는 표기가 확실해 백석의 번역본임이 밝혀졌다.
이 판본을 현대어로 교정하는 데 참여한 방 교수는 “백석처럼 위대한 시인이 폐쇄적 동양주의에 머무르지 않고 서양문화를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종합해 우리의 길을 찾아가려 시도했다는 데서 의미를 찾을 수 있다”고 설명했다. 최근 10여년 동안 국문학계에선 일제 말기 조선 문인들이 일본의 대동아주의(아시아가 단결해 서구문명에 맞서야 한다는 일본의 논리)를 내면화해 그대로 따랐다는 주장이 주류를 이뤘다. 하지만 이번 발굴로 일제 말기 조선 문학을 이처럼 일반화할 수 없게 됐다는 얘기다. 방 교수는 “조선을 한국 문학의 뿌리가 아니라 일본 문학의 변방쯤으로 치부하는 국문학계 일부 주장을 반박하는 유력한 자료가 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백석의 개인적 운명을 보여주는 것도 이 번역본의 의미 중 하나로 꼽힌다. 여러 번 결혼에 실패하고 애인 김자야와도 헤어진 백석은 일제의 식민지로 전락한 조국을 등지고 만주로 떠났다. 백석은 가족과 여러 명의 남자들로 인해 죽음을 맞게 되는 비극적 운명의 테스를 이런 자신과 동일시했다는 해석이다. 유 교수는 “백석이 대표작 ‘남신의주유동박시봉방’에서 방랑적인 삶을 살아야 하는 운명을 노래한 것은 이런 까닭”이라고 설명했다.
‘이때 나는 내 뜻이며 힘으로, 나를 이끌어가는 것이 힘든 일인 것을 생각하고,/이것들보다 더 크고, 높은 것이 있어서, 나를 마음대로 굴려가는 것을 생각하는 것인데,/(…)/먼 산 뒷옆에 바우 섶에 따로 외로이 서서,/(…)/그 드물다는 굳고 정한 갈매나무라는 나무를 생각하는 것이었다.’
박한신 기자 hanshin@hankyung.com
최 교수는 서울 인사동의 한 음식점에서 기자간담회를 열고 “중국이나 북한 쪽에서나 자료를 구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서울 한복판에 있는 걸 확인하고 ‘등잔 밑이 어둡다’는 말을 실감했다”고 말했다. 최 교수는 국내 모든 도서관의 자료를 뒤지고 중국에까지 연락을 하던 중 서강대 로욜라도서관에서 이 판본을 찾아냈다. 이후 방민호(서울대)·최유찬(연세대) 교수와 함께 복간을 준비했다.
백석이 번역한 판본은 ‘테스’의 국내 첫 번역서다. 19세기에서 20세기로의 전환을 알리는 소설로 평가받는 ‘테스’는 당시 일본 대학의 영문과에서 필수 강독 작품으로 꼽힐 정도로 인기가 높았다. 유성호 한양대 국문과 교수는 “백석 또한 일본의 아오야마가쿠인에서 공부하던 시기에 ‘테스’를 접했고 이를 국내에 소개했던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조선일보 기자로 일하던 백석은 1939년 조선일보가 폐간되면서 분리된 출판사인 ‘조광사’에서 이 소설을 번역 출판했다. 최 교수가 발굴한 원본은 표지가 사라진 상태지만, 뒷면에 ‘조광사 1940년 9월 30일’이라는 간기와 당시 사장이었던 ‘발행인 방응모’라는 표기가 확실해 백석의 번역본임이 밝혀졌다.
이 판본을 현대어로 교정하는 데 참여한 방 교수는 “백석처럼 위대한 시인이 폐쇄적 동양주의에 머무르지 않고 서양문화를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종합해 우리의 길을 찾아가려 시도했다는 데서 의미를 찾을 수 있다”고 설명했다. 최근 10여년 동안 국문학계에선 일제 말기 조선 문인들이 일본의 대동아주의(아시아가 단결해 서구문명에 맞서야 한다는 일본의 논리)를 내면화해 그대로 따랐다는 주장이 주류를 이뤘다. 하지만 이번 발굴로 일제 말기 조선 문학을 이처럼 일반화할 수 없게 됐다는 얘기다. 방 교수는 “조선을 한국 문학의 뿌리가 아니라 일본 문학의 변방쯤으로 치부하는 국문학계 일부 주장을 반박하는 유력한 자료가 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백석의 개인적 운명을 보여주는 것도 이 번역본의 의미 중 하나로 꼽힌다. 여러 번 결혼에 실패하고 애인 김자야와도 헤어진 백석은 일제의 식민지로 전락한 조국을 등지고 만주로 떠났다. 백석은 가족과 여러 명의 남자들로 인해 죽음을 맞게 되는 비극적 운명의 테스를 이런 자신과 동일시했다는 해석이다. 유 교수는 “백석이 대표작 ‘남신의주유동박시봉방’에서 방랑적인 삶을 살아야 하는 운명을 노래한 것은 이런 까닭”이라고 설명했다.
‘이때 나는 내 뜻이며 힘으로, 나를 이끌어가는 것이 힘든 일인 것을 생각하고,/이것들보다 더 크고, 높은 것이 있어서, 나를 마음대로 굴려가는 것을 생각하는 것인데,/(…)/먼 산 뒷옆에 바우 섶에 따로 외로이 서서,/(…)/그 드물다는 굳고 정한 갈매나무라는 나무를 생각하는 것이었다.’
박한신 기자 hanshi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