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마거릿 대처가 남긴 큰 교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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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제완화와 시장친화 개혁으로 영국병 몰아낸 '철의 여인'의 신념
대중영합 않는 '줄푸세'와 일치
안재욱 < 경희대 교수·경제학 jwan@khu.ac.kr >
대중영합 않는 '줄푸세'와 일치
안재욱 < 경희대 교수·경제학 jwan@khu.ac.kr >
‘철의 여인’ 마거릿 대처 전 영국 총리가 지난 8일 87세의 나이로 타계했다. 그는 1979년 보수당 당수로서 영국 역사상 최초의 여성 총리가 된 이래 11년 6개월 동안 국정을 이끌며 ‘영국병’에 찌들어 활력을 잃고 쇠퇴해 가던 영국을 되살려냈다. 당시의 지배적 정치 이념인 복지국가론을 버리고 자유주의에 입각한 경제정책을 단행해 영국의 성장 동력을 창출하고, 자율과 책임을 중시하는 경제 개혁으로 국가 경쟁력을 높였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영국은 케인스 경제학을 바탕으로 방만한 재정운영을 하며 경제개입을 늘리고 대규모 복지정책과 노동자 과보호 정책을 펼쳤다. 그러자 근로의욕 상실과 민간경제 활동의 위축으로 1960~70년대 연 10%대의 높은 인플레와 저생산성, 잦은 노사분규 등을 겪으면서 국가 경쟁력이 약화되는 소위 ‘영국병’을 앓았으며, 급기야 1976년 국제통화기금(IMF)으로부터 구제금융을 받는 처지에 이르렀다. 상황은 더욱 악화돼 갔다. 1970년대 말 정부의 임금 정책에 항의하는 공공분야 노동자들의 전국적인 파업으로 거의 무정부 상태가 됐다. 거리에는 쓰레기가 쌓이고 응급실은 처치를 받지 못한 환자들로 넘쳐났다.
이런 혼란 속에 1979년 내각 불신임안 통과로 치른 총선에서 보수당이 승리하고 총리로 취임한 대처는 강성 노조와 과도한 사회복지 제도 등 국가 경쟁력을 약화시키는 정책들을 과감하게 몰아냈다. 노동시장의 유연성 제고를 위해 노동관계법 개정, 임금제도 및 사회보장제도 등의 개혁을 추진했으며, 각종 규제완화를 통해 경제활동에 대한 정부의 간섭을 축소하고 시장 친화적 경쟁 질서를 구축했다. 개인의 자유와 민간기업 활동을 확대하기 위해 공기업을 민영화했고, 빅뱅으로 불리는 금융개혁을 추진했다. 그러자 영국 경제가 다시 살아났다. 1980년 18%였던 소비자물가가 1986년 3%로 하락했고, 그의 집권 11년 동안 국내총생산은 23.3% 증가했으며, 일자리가 33.3% 늘었다.
그 과정은 순탄치 않았다. 강력한 반대에 부딪혔고 그의 의지는 시험받았다. 그러나 그는 단호했으며, 개혁 의지를 굽히지 않았다. 1984년 영국 노조 가운데 가장 강력하고 전투적인 탄광노조를 상대로 51주간의 치열한 투쟁을 벌인 끝에 법과 질서를 회복시켰다. 기득권을 지키려는 관리들의 반발에 굴하지 않고 민영화를 가속화해 기업의 생산성과 글로벌 경쟁력을 높였다.
그는 83%였던 최고소득세율을 40%로, 33%였던 기본소득세율을 25%로 낮추고, 저소득층의 소득세를 면제하는 한편 정부지출을 줄이며 작은 정부를 실현해 나갔다. 또 자본 이동을 방해하는 외환통제를 제거하고 통화 증가율을 낮췄다. 경제가 회복하기까지는 시간이 걸려 민심이 호의적이지 않자 각료들은 세금을 올리고 정부지출을 늘리며 정책방향을 되돌릴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그는 “돌아가고 싶으면 당신들이나 돌아가시오. 나는 돌아가지 않습니다”라며 단호히 거부했다.
대처는 갔다. 그는 국가의 장래를 위해 지도자가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는 전범(典範)을 남겼다. 한 국가의 지도자는 대중에 영합하지 않고, 확실한 철학과 그것을 실천하는 강력한 의지가 있어야 한다는 것을 보여 주었다. 세계사는 자유주의 이념이 실현된 자유시장 경제를 채택한 국가들은 번영과 풍요를 누린 반면, 반(反)자유주의 반시장경제를 채택한 국가들은 멸망하거나 쇠퇴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대처는 이것을 간파했고 이것을 실행에 옮겼다.
지금 한국에서는 유감스럽게도 경제민주화나 복지가 더 강조되고 있다. 한국 역시 현재의 침체를 탈피해 경기가 회복되고 국가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 자유주의를 바탕으로 한 국정운영이 필요하다. 자율과 책임을 강조해야 미래 성장 동력이 발굴돼 ‘창조경제’가 일어난다. 2007년 한나라당 대선 후보 경선 때 내세웠던 박근혜 대통령의 ‘줄푸세(세금을 줄이고, 규제를 풀고, 법치를 세우자)’는 ‘대처리즘’과 일치한다. 지금의 어려움을 헤쳐나가는 데는 ‘줄푸세’가 여전히 유효하다. 박근혜 대통령의 실천적 의지를 기대하며, 큰 교훈을 남긴 ‘철의 여인’의 명복을 빈다.
안재욱 < 경희대 교수·경제학 jwan@khu.ac.kr >
2차 세계대전 이후 영국은 케인스 경제학을 바탕으로 방만한 재정운영을 하며 경제개입을 늘리고 대규모 복지정책과 노동자 과보호 정책을 펼쳤다. 그러자 근로의욕 상실과 민간경제 활동의 위축으로 1960~70년대 연 10%대의 높은 인플레와 저생산성, 잦은 노사분규 등을 겪으면서 국가 경쟁력이 약화되는 소위 ‘영국병’을 앓았으며, 급기야 1976년 국제통화기금(IMF)으로부터 구제금융을 받는 처지에 이르렀다. 상황은 더욱 악화돼 갔다. 1970년대 말 정부의 임금 정책에 항의하는 공공분야 노동자들의 전국적인 파업으로 거의 무정부 상태가 됐다. 거리에는 쓰레기가 쌓이고 응급실은 처치를 받지 못한 환자들로 넘쳐났다.
이런 혼란 속에 1979년 내각 불신임안 통과로 치른 총선에서 보수당이 승리하고 총리로 취임한 대처는 강성 노조와 과도한 사회복지 제도 등 국가 경쟁력을 약화시키는 정책들을 과감하게 몰아냈다. 노동시장의 유연성 제고를 위해 노동관계법 개정, 임금제도 및 사회보장제도 등의 개혁을 추진했으며, 각종 규제완화를 통해 경제활동에 대한 정부의 간섭을 축소하고 시장 친화적 경쟁 질서를 구축했다. 개인의 자유와 민간기업 활동을 확대하기 위해 공기업을 민영화했고, 빅뱅으로 불리는 금융개혁을 추진했다. 그러자 영국 경제가 다시 살아났다. 1980년 18%였던 소비자물가가 1986년 3%로 하락했고, 그의 집권 11년 동안 국내총생산은 23.3% 증가했으며, 일자리가 33.3% 늘었다.
그 과정은 순탄치 않았다. 강력한 반대에 부딪혔고 그의 의지는 시험받았다. 그러나 그는 단호했으며, 개혁 의지를 굽히지 않았다. 1984년 영국 노조 가운데 가장 강력하고 전투적인 탄광노조를 상대로 51주간의 치열한 투쟁을 벌인 끝에 법과 질서를 회복시켰다. 기득권을 지키려는 관리들의 반발에 굴하지 않고 민영화를 가속화해 기업의 생산성과 글로벌 경쟁력을 높였다.
그는 83%였던 최고소득세율을 40%로, 33%였던 기본소득세율을 25%로 낮추고, 저소득층의 소득세를 면제하는 한편 정부지출을 줄이며 작은 정부를 실현해 나갔다. 또 자본 이동을 방해하는 외환통제를 제거하고 통화 증가율을 낮췄다. 경제가 회복하기까지는 시간이 걸려 민심이 호의적이지 않자 각료들은 세금을 올리고 정부지출을 늘리며 정책방향을 되돌릴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그는 “돌아가고 싶으면 당신들이나 돌아가시오. 나는 돌아가지 않습니다”라며 단호히 거부했다.
대처는 갔다. 그는 국가의 장래를 위해 지도자가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는 전범(典範)을 남겼다. 한 국가의 지도자는 대중에 영합하지 않고, 확실한 철학과 그것을 실천하는 강력한 의지가 있어야 한다는 것을 보여 주었다. 세계사는 자유주의 이념이 실현된 자유시장 경제를 채택한 국가들은 번영과 풍요를 누린 반면, 반(反)자유주의 반시장경제를 채택한 국가들은 멸망하거나 쇠퇴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대처는 이것을 간파했고 이것을 실행에 옮겼다.
지금 한국에서는 유감스럽게도 경제민주화나 복지가 더 강조되고 있다. 한국 역시 현재의 침체를 탈피해 경기가 회복되고 국가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 자유주의를 바탕으로 한 국정운영이 필요하다. 자율과 책임을 강조해야 미래 성장 동력이 발굴돼 ‘창조경제’가 일어난다. 2007년 한나라당 대선 후보 경선 때 내세웠던 박근혜 대통령의 ‘줄푸세(세금을 줄이고, 규제를 풀고, 법치를 세우자)’는 ‘대처리즘’과 일치한다. 지금의 어려움을 헤쳐나가는 데는 ‘줄푸세’가 여전히 유효하다. 박근혜 대통령의 실천적 의지를 기대하며, 큰 교훈을 남긴 ‘철의 여인’의 명복을 빈다.
안재욱 < 경희대 교수·경제학 jwan@khu.ac.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