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담없는 가격+혁신 디자인…'합리적 명품' 세계인 사로잡다
1950년대까지 소가죽으로 여성용 핸드백을 만드는 건 불가능했다. 너무 두껍고 질긴 탓이었다. 그때까지 모든 핸드백은 딱딱한 판에 얇고 부드러운 양가죽을 덧대 만들었다. 1960년대 들어 이 같은 고정관념이 깨졌다. 미국 뉴욕 맨해튼의 가먼트디스트릭트에 자리한 작은 무명 공방에서 변화가 시작된 것.

20년간 이 공방에서 가죽 세공업자로 일하던 마일스 칸과 릴리언 칸 부부는 소가죽을 부드럽게 만든 뒤 염색하는 신기술을 개발, ‘코치(Coach)’라는 브랜드를 탄생시켰다. 마침 전쟁이 끝난 뒤 직장 생활을 하는 여성이 크게 늘면서 부드럽고 튼튼한 코치 소가죽 핸드백은 명품 수제 가방으로 자리잡았다. 하지만 칸 부부가 고집한 고전적인 유럽식 디자인은 젊은 층을 사로잡지 못했고, 인기는 곧 시들해졌다. 전통적인 수작업 방식을 고집하던 코치는 1980년까지 매출 600만달러짜리 가내수공업에 불과했다.

코치의 성공을 이끈 건 이 무렵 전문 경영인으로 코치에 합류한 루 프랭크포트 회장 겸 최고경영자(66)다. 코치는 이때부터 가죽 소재의 핸드백 이외에도 다양한 소재를 활용해 액세서리·장갑·보석류·가방 등의 제품을 선보이기 시작했다. 100만원 이상의 고가품부터 일반인이 부담없이 살 수 있는 제품까지 가격대도 다양하다.

‘합리적인 명품’이라는 뜻의 ‘어포더블 럭셔리(affordable luxury)’라는 신조어까지 탄생시키며 대중적인 명품 시장의 선구자가 된 것. 지금은 연매출 48억달러의 명품 기업이 됐다. 프랭크포트 회장은 “럭셔리란 편안한 마음으로 구매할 수 있으면서도 혁신적인 가치를 지니는 것”이라고 말한다.

○뉴욕시 공무원 10년…“난 도전을 원했다”

프랭크포트 회장은 공무원 출신이다. 뉴욕시 경찰관이었던 아버지와 가정주부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그는 뉴욕 빈민촌인 브롱스에서 자랐다. 1960년대 헌터시립대에 다니며 반전(反戰)운동을 했고, 컬럼비아대에서 경영학 석사(MBA)를 마친 뒤 뉴욕시 공무원을 지냈다. 10년 넘게 보건 및 육아 행정 부문에서 성공적인 업적을 쌓았지만, 공직사회에 만족하지 못했다.

그는 미국 투자전문지 배런스와의 인터뷰에서 “성과에 대한 보상도 적절치 않았고, 도전 정신이 없는 구조에 좌절했다”고 공무원 시절을 회상했다. 공무원 조직에 지쳐갈 무렵 컬럼비아대에서 객원 강의를 하러 갔던 프랭크포트 회장은 우연히 예전 동문을 택시 정류장에서 마주쳤고, 코치에 대한 소식을 접했다. 뛰어난 가죽 제품을 만드는 회사인데 경영난에 시달리고 있고, 창업자가 새로운 전문 경영인을 물색하고 있다는 이야기였다.

프랭크포트 회장을 만난 코치 창업자 마일스 칸은 1979년 그를 신사업부문 부사장으로 전격 발탁했다. 프랭크포트 회장은 “마일스 칸이 갖고 있던 품질에 대한 자부심과 철학에 반했다”며 “그는 내 인생의 멘토”라고 말한다.

프랭크포트 회장은 유통구조부터 바꿨다. 좋은 상품을 구멍가게에서만 팔기 싫었지만, 그렇다고 아무에게나 판매를 맡길 수는 없었다. 중간상을 없애고 제품의 생산부터 판매까지 통합 관리하는 시스템을 도입했다. 그는 “명품 브랜드 루이비통이 자신의 고유 점포에서만 물건을 팔고 있고, 그 때문에 소비자의 신뢰를 얻었다는 데서 착안했다”고 말했다. 우편물을 발송하는 카탈로그 마케팅도 시작했다. 집집마다 우편물을 보내 코치에서 만든 제품을 적극적으로 노출시켰다.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1981년 첫 번째 코치 직영점을 매디슨가에 열자마자 긴 줄이 늘어섰다. 그 해 코치는 120만달러의 매출을 올렸다.

○위기일수록 공격적인 마케팅


1985년 코치 창업자는 가업을 물려받을 사람이 없자 미국 식품회사 ‘사라 리’에 3000만달러를 받고 회사를 넘겼다. 코치를 인수한 사라 리는 프랭크포트를 사장으로 앉혔다. 프랭크포트 회장은 당시 뉴욕에서 수작업으로 만들던 방식을 세계 각국으로 아웃소싱했다. 그해 코치의 매출은 1900만달러를 달성했다.

1988년부터는 처음으로 가죽이 아닌 제품을 만들어 팔았다. 해외로도 눈을 돌렸다. 미국 북동부와 중부에 머물러 있던 판매망을 일본 등 전 세계로 넓혔다. 뉴욕 매장의 매출 대부분을 아시아 고객이 올렸다는 데서 나온 전략이다. 이때부터 코치는 종합 명품 브랜드로 발돋움했다.

1997~98년 아시아 금융위기가 닥쳤을 때도 역발상은 빛났다. 사업을 축소하기보다 경쟁제품에 비해 가격을 낮추는 방식을 택했다. 10~20% 낮아진 가격과 화사한 색상의 제품은 젊은 세대들의 눈길까지 사로잡았다. 코치는 2000년 뉴욕증권거래소에 상장했다. 2001년부터 2011년까지 회사의 매출은 22%, 주당 이익은 35%나 뛰었다.

프랭크포트 회장의 철학은 단순하다. △좋은 재질을 쓸 것 △다른 브랜드와 전혀 다른 이미지를 가져갈 것 △부담없는 가격으로 내놓을 것 등이다. 그의 철학은 코치 매장에 가 보면 그대로 알 수 있다. 40달러에서 270달러에 이르는 넓은 가격 범위의 제품이 모두 있다. 진열 기준은 가격이 아니라 색깔과 모양이다. 프랭크포트 회장은 “소비자들은 우리 생각보다 훨씬 똑똑해서 이 제품이 다른 제품에 비해 왜 비싸고 싼지 금방 알아챈다”며 “내가 원하는 스타일에 돈을 지불하는 것이지, 가격에 맞춰 스타일을 바꾸지는 않는다”고 강조한다.

○‘합리적 명품’ 탄생시킨 ‘숫자경영’


프랭크포트 회장은 감각보다 숫자를 믿는다. 학창 시절 경제학자이자 철학자인 존 스튜어트 밀의 영향을 받은 까닭이다. 매출액과 수익률, 점포 수 등은 항상 외우고 다닐 정도다. 그의 꼼꼼한 ‘숫자경영’은 코치가 글로벌 시장으로 발을 넓히는 데 크게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코치는 매년 약 10만명에 달하는 사람을 상대로 설문을 한다. 전문 설문기법으로 철저한 시장조사를 한 뒤 특정 국가에 진출한다. 그는 “1990년대 말 일본 소비자들은 이미 명품 가방에서 액세서리로 눈을 돌리고 있었기 때문에 다양한 재질의 제품을 선보였지만, 한국에는 아직 코치라는 브랜드 인지도가 낮았기 때문에 가죽과 전통 문양이 들어간 제품 위주로 명품 이미지를 굳히는 데 주력했다”고 설명했다.

지난해 코치 매출의 90%는 미국과 일본에서 올렸다. 프랭크포트 회장은 나머지 아시아 국가와 중동 시장 개척에 주력하고 있다. 중국에는 지난해 95개 점포를 열었고, 올해 30개를 더 열 계획이다.

남성용 액세서리 시장에서도 선전하고 있다. 남성용 가방과 액세서리 시장은 50억달러 규모. 코치는 지난해 4억달러를 기록한 남성 제품군 부문이 2~3년 뒤에 10억달러의 매출을 올릴 것으로 자신하고 있다. 프랭크포트 회장은 “수십년간 파리의 여인들이 알고 있던 노하우, 즉 패션의 완성은 액세서리라는 원칙을 미국인들이 1990년대 중반에 깨달은 뒤 코치의 매출이 급성장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김보라 기자 destinybr@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