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줄과 날줄] 유쾌하고 예쁜 것
4월인데도 여러 날 꽃샘추위가 계속돼 여간 춥게 느껴지는 것이 아니다. 나라 사정도 어렵긴 마찬가지여서 날씨만큼이나 을씨년스럽다. 북한은 하루가 멀다 하고 미사일을 발사하겠다며 전쟁 위협을 하고 장기 불황은 그칠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시절이 사납다고 해도 봄은 봄다워야 하고 사람은 사람다워야 한다. ‘행복을 그린 화가’라는 칭호가 잘 어울리는 르누아르는 그림을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그림이란 즐겁고 유쾌하며 예쁜 것이어야 한다. 세상에는 이미 불유쾌한 것이 너무 많은데 또 다른 불유쾌한 것을 만들어낼 필요가 어디 있는가.”

그래서 이렇게 봄이 왔는데도 아직 봄이 온 것 같지 않은 계절과 어수선한 시국 사이에서 나는 르누아르가 말한 ‘유쾌하고 예쁜 것’이 무엇일까 생각해본다. 그러다가 김광규 시인의 다음 시를 떠올려본다.

‘그렇다/몸이다/마음은 마음은 혼자 싹트지 않는다/몸을 보여주고 싶은/마음에서/해마다 변함없이 아름다운/봄꽃들 피어난다’(김광규 ‘이른 봄’)

이 시의 앞부분을 보면 이런 내용이다. 상가 의복 수선 코너에서 엉덩이에 짝 달라붙게 청바지를 고쳐입은 초등학생처럼 앳된 얼굴을 한 여중생. 그 여중생은 그것도 모자라 수선집 주인에게 무릎이 나올 듯 말 듯하게 교복 치마를 짧게 줄여달라고 한다. 이 시에서 보이는 사춘기의 앳된 소녀와 봄꽃의 절묘한 조화는 그야말로 유쾌하고 예쁘다.

세상이 어렵고 어수선해도 우리 주위에 이렇게 예쁜 것들이 많다면 세상은 살 만해질 것이다. 아니 세상이 어렵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절망이나 불행으로만 보지 말고 그 안에서 생동하는 예쁜 것을 볼 수 있는 마음의 눈이 있다면 우리의 몸도 유쾌하고 가벼워질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이런 예쁜 것들을 보려고 한다면 사람에 대한 신뢰가 없이는 곤란할 것이다.

앞에서 말한 르누아르도 사람을 그리는 화가였기에 메마른 일상의 순간들 속에서 황금빛과 같이 일렁이는 삶의 기쁨을 그렸다. 르누아르는 부유한 집에서 태어난 화가는 아니었다. 아버지는 재봉사였고 어머니는 양재사였다. 그러나 그림 그리기를 좋아하는 르누아르를 위해 양친은 화가가 되려는 아들을 독려했고 그것으로 밥벌이를 할 수 있도록 재주를 키워주려 했다. 그가 자신의 눈길이 머물렀던 기쁨, 그 아름다움과 행복의 세계를 공간에 기록할 수 있었던 것은 가난하지만 자식이 좋아하는 일을 하도록 키워준 부모에게서 인간에 대한 신뢰를 배웠기 때문이었다.

지금은 하늘나라로 가셨지만 살아생전에 내 어머니께서도 시를 쓰는 자식인 내게 이런 말씀을 자주 하셨다. “어머니가 기도하는 자식은 망하지 않는다.” 어머니는 일차적으로는 시를 쓰는 가난한 자식이 안쓰러워서 그런 말씀을 하셨겠지만, 그 말씀 속에는 가난한 자식이 반드시 시로 성공할 것이라는 확신이 깔려 있었을 것이다. 어머니는 심지어 자식이 좋아하는 것을 하게 하기 위해 자신의 사고방식조차도 바꾸었다. 무슨 당부할 게 있으면 자식이 시인이니까 자신도 글을 쓸 줄 알아야 한다며 맞춤법도 틀리고 글자도 삐뚤빼뚤하지만 내게 편지를 쓰셨다. 그런 어머니 밑에서 나 역시 사람을 사랑하는 법을 배웠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마르틴 부버는 현대인은 3인칭의 세계에 살고 있다고 말한 바 있다. ‘나와 너’라는 1인칭과 2인칭은 인격을 나타내는 대명사이지만 3인칭은 대개 물체를 지시한다. 즉 현대인은 ‘나와 너’ 사이의 인간적 관계보다는 나를 둘러싸고 있는 직위나 환경, 소유물 등에 관심을 가진다. 이런 3인칭 간의 사귐 속에서는 진실보다는 누가 내 편인가가 중요해진다. 이런 관계 속에서는 필연적으로 소외가 발생할 수밖에 없다. 그 소외를 이기는 길은 사람에 대한 신뢰밖에 없다. 나라 사정도 우리들의 삶도 어렵지만 꽃샘추위 속에서 아름답게 꽃봉오리를 맺는 봄꽃들을 바라보며 새삼 사람의 소중함에 대해 생각해본다.

박형준 < 시인 agbai@naver.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