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제유지용 외화조달 차질 비상
한상춘 객원논설위원 schan@hankyung.com
한국 등 주변국을 아랑곳하지 않고 시소게임을 벌이듯 계속되고 있는 북한의 외줄타기 전략으로 지금까지 국제·남한·북한 시장에 미친 영향을 보면 당사국인 북한의 타격이 가장 크다. 아직까지 국제금융시장은 별다른 영향을 받지 않는 모습이다. 미국을 비롯한 세계 증권시장은 비교적 좋은 흐름이 유지되고 있다.
북한 사태에 따라 ‘안전자산을 선호하는 경향(flight to quality)’이 뚜렷하게 심해지는 것도 아니다. 달러평가지수는 82 안팎에서 큰 변화가 없다. 세계 금 수요의 30%를 차지하는 인도의 수입억제책 등이 더 크게 작용하고 있지만, 국제 금값은 온스당 1500달러 밑으로 폭락했다. 미국 국채 가격도 하락세가 지속되고 있다.
한국 금융시장은 영향을 받고 있긴 하지만 이번 북한 사태의 심각성에 비해 그 정도가 크지 않다는 것이 일반적인 평가다. 원화가치와 코스피지수의 하락폭은 5% 안팎에 그치고 있다. 이마저도 전부 북한 사태에 따른 영향으로 볼 수 없다. 일본 아베정부의 극우적인 엔저 정책 등에 대한 한국은행의 소극적인 대응이 더 큰 요인으로 지적되고 있다.
하지만 북한의 사정은 다르다. 이미 북한에 대한 외국인 투자와 각종 국제사회 지원 등이 중단돼 경제 고립화 현상이 갈수록 심해지고 있다. 남북한 간 관계 진전이 있을 때마다 간헐적으로 형성됐던 북한 채권 거래도 실종됐고, 가격도 한낱 ‘휴지 조각’에 불과한 수준까지 떨어졌다.
북한 돈인 원화가치도 폭락하고 있다. 북한의 공식 환율은 달러당 100원이다. 하지만 암시장(black market)에서는 8600원 선에 거래되고 있다. 공식적으로 100원에 환전한 1달러를 암시장에 내다 팔 경우 8600원을 받을 수 있다는 의미다. 공식시장 접근이 가능한 북한의 권력층이 엄청난 환차익을 누릴 수 있는 것이 요즘 북한의 외환시장이다.
공식적인 환율과의 괴리를 더 벌어지게 하기 위해서는 암시장에 유입되는 외화(미국 달러화)를 차단해야 한다. 이번 사태 이후 중국, 러시아를 포함한 대외무역과 외국인 관광, 심지어 개성공단을 차단하는 것을 이런 측면에서 보는 국제금융시장의 시각도 만만치 않다. 조만간 북한 원화가치는 달러당 1만원 이상으로 떨어질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북한이 외화 공급을 차단할 경우 체제 유지를 위한 외화 조달에는 차질을 빚을 수밖에 없다. 여러 가지 견해가 있지만 북한이 체제 유지를 위한 최소 외화가득액이 1년에 50억달러는 돼야 한다는 것이 정설이다. 이 때문에 암시장에서 누릴 수 있는 환차익만을 겨냥해 외화 공급을 무기한 차단할 수는 없다.
북한의 역사는 체제 유지를 위한 외화 조달의 험난한 시기였다고 볼 수 있다. 서방에 대해 ‘디폴트(default국가채무 불이행)를 선언한 1970년대 중반 이전에는 북한이 자체 신용으로 채권을 발행해 필요한 외화를 조달했다. 그 뒤 거래된 북한 채권은 1970년대 중반 이전에 발행했거나, 상환불능 처리된 북한 채무를 바탕으로 BNP파리바 등이 발행한 세컨더리 채권이다.
1970년대 중반 이후 1990년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기까지 북한의 외화 조달은 옛 소련 등 동맹국에 전적으로 의존했다. 이른바 냉전 시대에 옛 소련은 공산주의 체제 결속을 위해 북한에 외화를 지원할 필요가 있었다. 이 시기에 시베리아 지역 등에 북한의 벌목공 파견 등도 왕성하게 이뤄졌다.
냉전 시대가 종식된 이후 북한의 외화 조달은 갈수록 어려워졌다. 궁여지책 속에 고안해 낸 것이 국제통화기금(IMF), 세계은행(World Bank), 아시아개발은행(ADB) 등 국제금융기구에 가입하는 길이다. 이들 기구에 가입할 경우 공산주의 체제를 유지하느냐와 상관없이 인류 공영 차원에서 지원되는 ‘저개발국의 성장 촉진을 위한 외화자금’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각종 국제금융기구에 최대 의결권을 갖고 있는 미국의 반대로 무산됐다.
2000년대 들어서 북한의 외화 조달이 얼마나 어려워졌는지는 외화가득원을 보면 극명하게 드러난다. 위조지폐인 ‘슈퍼 노트’ 발행, 마약 밀거래 등은 국제사회에서 문제가 될 정도로 많아졌다. 심지어 ‘베이징 컨센서스’의 일환으로 해외자원 확보를 통해 세(勢)를 확장하려는 중국의 전략과 맞물려 북한이 부존자원을 매각해 외화를 조달했다. 천안함, 연평도 등 한국에 대한 도발 사태도 이 시기에 집중적으로 이뤄졌고 이번 사태를 그 연장선상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결국 이번 사태에 따른 최대 피해자는 북한이고, 어느 순간에 한국을 포함해 서방에 유연한 자세로 나올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조심스러운 낙관론이 고개를 들고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북한 사태가 지속되는 가운데 최근 들어 외국인들이 증시에 복귀할 조짐을 보이는 것은 충분한 근거가 있다. 이번에는 1997년 외환위기 당시처럼 투자상대국인 한국의 불안감을 더 증폭시켜 환차익을 누리는 ‘하이에나형 환투기’ 성격은 약하다.
한상춘 객원논설위원 scha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