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3년 2월 경기도 안양 1201건설공병단에서 전우들과 기념촬영한 조용근 당시 병장(오른쪽 두 번째).
1973년 2월 경기도 안양 1201건설공병단에서 전우들과 기념촬영한 조용근 당시 병장(오른쪽 두 번째).
“조 병장 빨리 집으로 가보게!”

1972년 1월 중순, 추운 날씨에 부대 막사 주변의 제설 작업을 마치고 내무반에 막 들어서고 있는데 인사계 선임하사로부터 어머님이 위독하시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그리고 며칠 뒤 어머님은 52세의 많지 않은 나이에 돌아가셨다. 그래서인지 나는 후반부 병영생활을 정신적으로 몹시 힘든 상태에서 보냈다.

[1社1병영] 조용근 천안함재단 이사장, 나이 어린 고참에 절대복종…나를 버리는 지혜 깨달아
1968년 1월21일 김신조를 비롯한 북한 무장공비들이 청와대 근처까지 침투했다가 우리 군과 교전까지 벌어진 엄청난 사건이 터진 지 몇 년 지났지만 당시 군대 분위기는 여전히 살벌했다. 박정희 대통령이 이 사건을 계기로 해이해진 군기강을 크게 질타했고 육·해·공 전군은 극도의 긴장 상태였다.

그 즈음인 1970년 4월20일 나는 국세청에서 하급직 공무원으로 근무하던 중 24세의 나이로 논산훈련소에 입대했다. 같은 또래에 비해 다소 늦게 입대한 터라 서너 살 어린 선임들에게 꼬박꼬박 존대말을 해야 했다. 또 선임병들의 갖은 폭언은 물론이고 한밤에 집합해 기합을 받은 뒤 보초근무까지 서야 하는 몹시 힘든 상황이었다.

더군다나 비교적 자유로운 분위기의 국세청에서 근무하다 입소했기 때문에 내가 느낀 어려움은 더 컸던 것 같다. 여기에 나를 특히 아껴주던 어머님도 세상을 떠나셨으니 마음을 다스릴 수 없는 상태까지 간 것이다.

훈련병 시절에는 이런 일도 있었다. 6주간의 논산훈련소 훈련을 마치고 보직 병과를 받기 위해 훈련소 배출대대에서 약 보름간 대기하다 다른 동기에 비해 늦게 김해공병학교에 가서 8주간의 후반기 교육을 받게 됐다.

그때 나를 황당하게 만든 것은 군번도 나보다 늦은 후임병이 후반기 김해공병학교에 나보다 1주일 먼저 들어왔다고 해서 한 기수 늦게 들어온 우리 기수를 대표해 향도(반장)로 있던 나를 불러 곡괭이 자루로 기합을 주면서 선배 대접을 하라는 것이었다. 8주간의 교육 내내 선임 대접을 해야만 하는 웃지 못할 일이 벌어졌다.

무엇보다 ‘김신조 사건’으로 군 복무기간이 몇 개월씩 늘어나면서 나는 병장 계급장만 15개월 이상 달고 다녀 군대 말년 생활이 얼마나 지루했는지 모른다. 35개월간의 군생활을 마치고 국세청에 다시 복직했다. 한 달 모자라는 3년간의 군복무 중 나는 많은 것을 배웠다.

‘군대라는 조직이 일반 직장과는 다르구나. 비록 나이는 어리지만 어쨌든 나보다 선임병이니 그 명령에 절대 복종해야 하고 때론 자존심을 버려야 조직생활에서 살아남을 수 있겠구나’ 하는 진리 아닌 진리도 체득했다.

무엇보다 밑바닥부터 기며 군생활을 하다 보니 제대 후에도 밑바닥 인생의 실상을 알게 됐고, 나보다 더 어려운 상대방을 배려할 수 있는 자세도 배울 수 있었다.

내 아들도 늦은 나이(28세)에 입대했다. 그러나 별다른 사고 없이 무사히 군복무를 마쳤으니 이 또한 다행이다. 지금도 아들은 가끔 나에게 이야기한다. 어려운 여건에서 인내심을 키워 나가는 좋은 단련의 기회였다고 하면서 앞으로 살아가는 데 큰 보탬이 될 것이라고.

젊은이들에게 틈날 때마다 강조하는 이야기가 있다. 군대를 가면 어느 누구에게도 배울 수 없는 인내와 단련의 기회를 갖게 되고, 또 앞으로 이어질 길고 긴 인생 여정에서 보면 자신의 삶의 질을 한 단계 더 업그레이드할 수 있는 좋은 밑거름이 될 것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