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낭만주의’는 1930년 이탈리아의 미술사학자 마리오 프라즈가 처음 사용한 용어로, 인간 내면의 어둡고 비이성적인 측면을 파헤친 18세기 말과 19세기 초의 문학과 예술 작품을 말한다. 18세기 계몽주의가 지나치게 이성을 강조한 데 반발해 감성, 광기, 무의식의 세계에 주목한 이 새로운 움직임은 로맨틱한 사랑, 중세의 영웅담처럼 우리가 알고 있는 장밋빛 낭만주의의 그늘인 셈이다.
이번 전시에는 검은 낭만주의 계열 작품 및 그 영향을 받은 19세기 말 상징주의와 20세기 초 초현실주의 작품 등 200여점이 출품됐다.
가장 눈길을 끄는 작품은 검은 낭만주의의 첫 장을 연 작가 중 한 사람인 영국작가 존 헨리 푸젤리의 ‘악몽’(1781). 어두운 침실을 배경으로 막 숨이 넘어간 듯한 젊은 여인이 보이고 그 여인의 배 위에는 꿈속에 나타나 여성을 겁탈한다는 몽마(夢魔)가 관객을 향해 음흉한 표정을 보내고 있다. 인간 내면에 자리한 공포심을 표현한 이 작품은 발표 당시 영국 사회에 엄청난 센세이션을 불러일으켰다. 전국 순회 유료 전시회가 열릴 정도로 인기를 모았다. 오늘날 블록버스터 전시의 원조인 셈이다. 국내에도 잘 알려진 메리 셸리의 공포소설 ‘프랑켄슈타인’(1818)도 이 작품의 영향 아래 탄생했다.
‘‘잠자는 이성’(무지)은 악령을 불러들인다’는 명언을 남긴 스페인 작가 프란시스코 고야는 인간의 무지가 초래하는 비극성에 주목했다. ‘공중의 마법사들’은 죽은 자의 피를 빠는 마법사들을 그린 작품으로 당시 스페인 사회에 만연한 미신과 이에 대한 공포심을 풍자한 작품이다.
‘절규’의 작가 에드바르 뭉크의 ‘뱀파이어’(1895)는 젊은 남자의 피를 빨고 있는 붉은 머리의 여인을 그린 것으로 어두운 배경 속에서 빛을 발하는 여인의 하얀 피부와 붉은색이 강렬한 대비를 이뤄 마치 공포영화의 한 장면을 보는 것 같다.
한편 전시장 한켠에서는 프리츠 랑, 앨프리드 히치콕부터 팀 버튼의 작품에 이르기까지 검은 낭만주의 작품에서 영감을 얻은 공포영화의 명장면들이 상영되고 있다. 관객은 저마다 영화관과 TV, 게임에서 본 낯익은 영상과 이미지가 검은 낭만주의의 자양분을 먹고 탄생한 것임을 알고 소스라치게 놀란다.
“검은 낭만주의는 어느 한 시대나 미술양식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오늘날까지 지속적으로 반복되는 사상”이라는 콤 파브르 오르세미술관 큐레이터의 설명에 이번 전시의 기획 의도가 압축돼 있다. 옛것이 새것을 낳는 젖줄임을 일깨워주는 전시다. 6월9일까지.
정석범 문화전문기자 sukbumj@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