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로다의 '1개월 마법' 비결은
지난달 23일 도쿄 니혼바시에 있는 일본은행 강당. 구로다 하루히코 신임 일본은행 총재(사진)가 단상에 올랐다. 취임 후 전체 직원과 처음으로 마주한 자리. 마이크를 잡은 구로다 총재의 표정은 결연했다. “그동안 일본은행은 물가안정이라는 주된 사명을 달성해 내지 못했다. 이런 중앙은행은 (세계에서) 일본은행뿐이다.” 갑작스러운 질책에 직원들은 순간 모두 얼어붙었다. 니혼게이자이신문은 그때의 상황을 “일본은행을 때려 부수겠다는 선전포고 같았다”고 전했다.

구로다 총재가 취임 한 달을 맞았다. 표면적인 성과는 눈부시다. 주가는 연일 상승세고, 숙원이던 ‘1달러=100엔대 환율’도 어느새 목전이다. 철저한 준비와 신속한 결단, 시장과의 소통 능력 등이 ‘구로다의 마술’을 가능케 한 원동력이라는 분석이다.

◆“한 달 안에 승부 낸다”

구로다 총재는 전체 직원 조례를 마치자마자 자신의 집무실로 우치다 신이치 기획국장을 불러 명확한 지침을 내렸다. “2년 내에 2%의 물가상승률을 달성한다는 목표는 실현 가능하다. 우선 일본은행 임직원부터 믿도록 하라. 가능한 정책은 총동원한다.”

대대적인 양적완화 정책을 이끌 이른바 ‘구로다 팀’을 짜는 작업도 속전속결로 해치웠다. 중심축 역할을 할 기획담당이사 자리는 아예 취임도 하기 전인 지난달 18일에 발령냈다. 시장에는 ‘시라카와 마사아키 전 총재의 마지막 인사’라고 알려졌지만, 실상은 구로다 총재의 작품이었다.

그는 일본은행 총재에 내정된 뒤부터 줄곧 ‘스피드’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언론과의 인터뷰에서도 “최초의 한 달이 전부”라는 말을 반복했다. 아베노믹스(아베 신조 일본 총리의 경제 정책)에 대한 기대가 충만한 초반부에 승부를 내야 한다는 의미였다. 구로다 총재는 전임 시라카와 총재의 실패를 거울삼았다.

시라카와 전 총재는 2008년 리먼브러더스 쇼크 직후 미국 유럽 등이 대대적 양적완화에 나설 때 주춤거렸다. 이 바람에 나중에 15번이나 금융완화 정책을 내놨지만 퇴임할 때까지 ‘미온적’이라는 낙인을 버리지 못했다.

◆“쉬워야 통한다”

구로다 총재 취임 후 다음 금융정책 결정회의까지 남은 시간은 단 2주일. 황급히 통계부서에 지시를 내렸다. “물가 목표치를 달성하려면 통화량을 얼마나 늘려야 하는지 알아보라.” 며칠 뒤 보고서가 올라왔다. 결론은 화폐공급량을 기존보다 1.8배 늘려야 한다는 것. 그는 곧바로 수치를 수정했다. “1.8배는 알아듣기 어렵다. 2배로 고쳐라.”

지난 4일 양적완화 정책을 발표하는 자리에서도 ‘쉬워야 통한다’는 원칙은 철저하게 지켜졌다. 모든 게 ‘2’라는 숫자로 수렴됐다. 물가를 2년 내 2% 올리기 위해, 장기국채 보유량을 2배 늘리는 방식으로 시중 통화량을 2배 확대하고….

기자회견에는 이례적으로 ‘2’라는 숫자로 빼곡히 채워진 게시판도 등장했다.

국제무대에서도 구로다의 소통 능력은 먹혀들었다. 지난 19일 폐막한 주요 20개국(G20) 재무장관 회의에선 휴식시간마다 주요국 각료와 복도에 선 채로 설득전을 벌였다. 그 결과 ‘엔저(低) 용인’이라는 면죄부를 받아냈다.

구로다 총재의 한 달 성적은 기대 이상이다. 그러나 아직 끝난 건 아니다. 니혼게이자이는 “장기금리가 급등락하는 등 여전히 시장은 불안정한 상황”이라며 “구로다가 (일본 경제를 결딴내는) 파괴자가 될지, (새로운 시대를 여는) 창조자가 될지는 아직 불투명하다”고 지적했다.

도쿄=안재석 특파원 yagoo@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