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에세이] 항상 감사하는 마음으로
지난 반세기를 살아온 요즘 지난날을 돌이켜보며 여러 가지 생각을 한다. 일본 교토에서 태어나서 재일동포로 살던 어느 날 일본 발레협회 회장이었던 시마다 히로시 회장이 일본엔 없는 ‘국립’ 발레단이 한국에 있다고 이야기해줬다. 그 얘기를 들은 나는 1983년에 트렁크 하나만 들고 한국으로 건너왔다. 국립발레단 초대 단장이었던 임성남 단장은 가족도 친구도 한 명 없던 내가 발레리나로서 한국에서 활동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셨다.

1988년 ‘서울올림픽 문화예술 축전’을 위해 준비했던 작품 ‘왕자호동’에 낙랑공주로 출연을 했다. 낙랑공주의 아버지인 최리왕과 대립하면서 마지막에 자명고를 찢는 장면이 있는데 연습 도중에 갈비뼈가 부러졌다. 세탁기에 아기 기저귀를 넣지 못할 정도로 아팠지만 “네가 무대에 서지 않으면 공연을 올릴 수 없다”는 임 단장의 말씀에, 꾹 참고 무사히 공연을 끝냈다. 당시에는 너무 힘들었지만 재일동포였던 나에게 한국적인 드라마가 강한 낙랑공주 역할은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 의미 있는 작품이다.

제2대 단장이었던 김혜식 단장은 나에게 후배들을 지도해줄 것을 권유하셨다. 처음에 나는 발레리나 또는 무용수로서의 활동밖에는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에 자신이 없어 거절했었다. 여러 번의 설득 끝에 지도위원을 하게 됐고, 국립발레단에서 제2의 인생이 시작됐다. 그러던 중 김 단장이 무용원 원장으로 자리를 옮기면서 나는 1996년 36세의 나이에 국립발레단 예술감독으로 임명됐다.

돌이켜보면 국립발레단 예술감독으로서 앞만 보고 달려왔다. 머릿속에서 ‘발레단’이라는 단어는 떠나지 않았고, 발레단이 내 가족이고 친구였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힘든 일도 많았고 스트레스 때문에 잠 못 이루는 날도 많았다. 그때마다 지금의 내가 있기까지 도움 주셨던 많은 분들의 조언과 단원들을 생각하면서 다시 일어났다.

가끔 나의 성공 스토리에 대해서 알고 싶다고 질문하시곤 한다. 그때마다 나는 얘기한다. “힘들 때마다 주변에 항상 도움을 주시는 분들이 운명처럼 나타났고, 좋은 분들과 인연을 맺으면서 힘을 냈습니다. 저를 일으켜 주시는 그분들의 한마디, 그리고 저를 끝까지 믿어주신 분들의 한마디가 지금의 저를 만들었습니다. 그분들이 없었다면 지금의 저도, 지금의 발레단도 없었을 것입니다.

저를 믿어 준 모든 분들과 단원들에게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최태지 < 국립발레단 예술감독 taejichoi3@hotmail.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