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RONG KOREA] 창투사도 포기한 '좀비 벤처'에 정부가 '벤처 인증' 도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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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처 생태계를 살리자 - (1) 무책임한 정부 정책
남발하는 벤처 인증
선정과정 전문성 결여…지원업체 숫자늘리기 급급
책임 안지는 보증제도
CEO가 보증서야 대출 "정부는 대부업만 하는 꼴"
비생산적인 지원 방식
될성부른 곳에 '집중' 않고 여러 곳에 찔끔 지원 '생색'
남발하는 벤처 인증
선정과정 전문성 결여…지원업체 숫자늘리기 급급
책임 안지는 보증제도
CEO가 보증서야 대출 "정부는 대부업만 하는 꼴"
비생산적인 지원 방식
될성부른 곳에 '집중' 않고 여러 곳에 찔끔 지원 '생색'
![[STRONG KOREA] 창투사도 포기한 '좀비 벤처'에 정부가 '벤처 인증' 도장](https://img.hankyung.com/photo/201304/AA.7404901.1.jpg)
#2.벤처캐피털 출신 컨설턴트 L씨는 지난해 한 정부기관의 벤처기업 지원 대상자 선정에 참여했다가 깜짝 놀랐다. 연예계 진출을 위해 자작 뮤직비디오 1편을 만든 경력이 전부인 대학생이 이를 문화콘텐츠비즈니스로 포장해 응모한 것에 3000만원을 지원키로 결정을 내렸기 때문이었다. L씨는 “연예인이 되려고 자작 비디오를 찍은 사람에게 정부 돈을 지원할 수 있느냐”고 항의했지만 소용없었다.
벤처기업협회가 지난해 11월 발표한 벤처기업 정밀실태조사에 따르면 국내 벤처기업 중 98.5%는 정부·공공기관 등으로부터 정책자금을 받거나 대출보증을 받았다. 벤처기업에 가장 중요한 자금줄이 정부였다는 뜻이다. 벤처기업 숫자는 느는데 벤처캐피털이 투자할 만한 회사를 못 찾고, 업체들의 수익성은 날로 영세해진다면 그 원인을 정부 정책에서 찾아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안타깝게도 위에 든 사례들은 예외적인 경우가 아니다. 이런 현상에 대해 전문가들은 정부의 전문성 결여와 무책임한 보증제도, 장기 전략 부재 등을 원인으로 꼽는다.
○숫자 늘리기에 급급한 정부
중소기업진흥공단 기술보증기금 신용보증기금 한국발명진흥회 서울산업통상진흥원 등 벤처 지원 명목으로 자금을 집행하는 기관은 헤아릴 수 없이 많다. 여기에 각 지방자치단체의 자금도 있다. 이러다보니 정부 지원 자금은 매년 급증하는 추세다. 중소기업청 등의 정책 자금은 2004년 2조6000억원에서 2010년 3조3000억원, 정부기관의 보증지원금은 같은 기간 46조5000억원에서 70조5000억원으로 크게 늘었다.
이 돈은 어떻게 집행될까. 매년 수십 차례씩 정부 지원 벤처기업 선정 작업에 참여하는 한 국책연구소 연구원의 말을 들어보자. “서류심사를 통과한 이들을 불러 20분 정도 프레젠테이션 시키고, 그 자리에서 바로 지원 대상을 정한다. 창업의 동기나 지속가능성, 팀의 경쟁력 등은 애당초 판단 기준이 아니다.”
이러다보니 정부가 지원하는 벤처기업의 규모(매출액 기준)가 갈수록 작아지는 건 당연지사. 한국개발연구원(KDI)은 지난해 말 ‘제2의 벤처붐을 맞고 있는가’라는 제목의 보고서에서 정부 지원을 받은 벤처기업의 평균 매출이 2005년 25억원대에서 2010년 10억원대로 계속 줄어들고 있다고 지적했다. 정부 지원을 받은 뒤에도 매출이 줄거나 정체된 회사가 많았다. 정부의 자금이 영세한 벤처에만 집중될 뿐 기업 성장에 기여하지 못했다는 건 정책자금 지원이 부실했다는 방증이다.
류한석 기술문화연구소장은 “전문성 있는 기업경쟁력 평가를 통해 정부 지원이 이뤄지는 게 아니라 실적 위주로 자금이 집행되다 보니 옥석이 가려지지 않는다”며 “정부가 특정 테마를 정해놓고 50개 벤처기업을 지원한다는 목표를 세우면 무조건 지원 업체 숫자만 채우는 게 지금의 벤처 지원제도”라고 꼬집었다.
○무책임한 보증제도
한국 벤처 지원제도의 백미는 대출·보증제도다. 김기완 KDI 산업정책연구부장은 “보증제도 자체가 혁신과 창조를 핵심 동인으로 삼는 벤처기업과 맞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는 왜 이런 지적을 했을까. 예컨대 신용보증기금은 벤처기업을 대상으로 3년 거치 연 2.7%의 저리 대출을 해준다. 4대 보험을 내는 정규직원 3명이 6개월간 근무하면 1억원까지 대출을 받을 수 있다. 단 조건이 있다. 최고경영자(CEO)가 연대보증을 서야 한다. 사업이 안 풀리면 다시는 재기하지 못할 정도로 치명타를 입을 수 있다.
정부가 벤처기업에 투자나 지원을 하는 게 아니라 대출이나 보증을 하는 건 한국 벤처정책의 독특한 부분이다. 대출·보증제도를 유지해온 것은 기본적으로 정부가 책임을 지지 않겠다는 뜻이라고 업계는 해석한다. 그러다보니 “정부가 벤처기업을 대상으로 대부업을 한다”는 목소리마저 나온다.
이런 대출·보증 방식은 돈을 빌려주는 쪽뿐 아니라 받는 쪽에도 도덕적 해이를 야기한다. 투자를 받았을 때의 막중한 책임감과 상호 견제가 생겨나지 않기 때문이다.
○전문성 없으면 민간에 맡겨야
‘비전문적’으로 ‘무책임’하게 벤처기업을 지원하면 결말은 뻔하다. 여러 기업에 필요한 돈보다 적게 주게 된다. 그래야 회수 실패의 위험성이 낮고, 많은 벤처 기업을 지원했다며 생색내기가 좋다. 한 벤처기업 대표는 “예를 들어 시장성과 맨파워, 기술경쟁력 등을 고려해 한 업체에 2억원을 지원해야 할 것을 똑같은 사업을 하는 세 업체에 7000만원씩 나눠주는 식”이라며 “정부는 실적으로 자랑할지 모르지만 벤처기업은 그 돈을 갖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말했다.
한국 벤처생태계의 문제가 정부 정책의 전문성, 책임감, 전략 등의 부재 때문이라면 해답도 명확하다. 우선 지원 벤처기업 숫자를 늘리려는 욕심을 버리고, 벤처기업이 자생할 수 있는 생태계를 만들기 위한 장기 계획을 마련하는 게 급선무다. 정부는 산파 역할만 하는 것이다.
문규학 소프트뱅크벤처스 대표는 “‘아이를 망치려면 돈을 주면 된다’는 옛말은 벤처기업 지원에도 그대로 적용된다”며 “정부가 기업에 무차별적으로 돈을 나눠주고 정책 효과를 기대한다면 수십년, 수백년이 지나도 아무 결실을 얻을 수 없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임원기/김병근 기자 wonki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