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똥돼지’는 초반 몇 판 져줘. 판 키우면 그때부터 이어폰 잘 듣고 ‘고수’ 시키는 대로 둬.”

“‘영감’은 대타가 돈 받아가서 일부러 질 거니까 돈 잘 받아놓고.”

영화 ‘타짜’ 뺨치는 방식으로 사기 도박 바둑을 벌여 억대 금액을 갈취한 일당이 검찰에 적발됐다. 이들은 서로를 닉네임(별칭)으로 부르며 사전 모의하고, 실력이 좋은 ‘고수’가 실제 바둑을 두는 ‘선수’를 첨단장비를 이용해 조종하는 식으로 치밀하게 범행해온 것으로 드러났다.

◆복대 속 무전기에 단추 카메라까지

서울중앙지검 형사3부(부장검사 장영수)는 첨단 장비를 이용한 사기 내기 바둑을 둬 판돈을 챙긴 혐의(사기)로 기원 운영자 임모씨(55)와 무직자 김모씨(56), 이모씨(55) 등을 구속 기소했다고 9일 밝혔다.

검찰에 따르면 임씨는 2000년대 초 바둑을 두며 알게 된 이씨 등과 내기 바둑 사기를 벌이기로 하고 범행 대상을 찾기 시작했다. 그러던 2011년 이씨는 알고 지내던 사업가 안모씨가 내기 바둑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고 “돈을 딸 만한 상대가 있으니 함께 가자”며 그를 서울 대치동의 한 기원으로 데려갔다.

임씨는 계획한 대로 ‘똥돼지’라 불리는 바둑 고수 또 다른 이모씨(수배 중)를 안씨의 내기 바둑 상대로 내보냈다. 임씨는 이씨의 바둑 급수를 낮게 속이는 등 바람을 잡았고 이씨도 초반 몇 판을 일부러 져줬다. “이러다 안되겠는데…판 좀 키울까요?” 이씨가 약오른 듯 말하자 계속 이기던 안씨는 바로 판돈을 키웠다.

하지만 치밀한 ‘작전’은 그제서야 시작됐다. 이씨의 몸속에는 무전기가 장착된 복대가, 옷 단추에는 초소형 카메라가 장착돼 있었다. 이를 통해 다른 건물에 있는 제3의 ‘바둑 고수’가 모니터로 바둑판을 보고 훈수를 뒀다. 귀에 부착한 특수 이어폰으로 ‘고수’의 조언을 들은 이씨는 몇 판을 연달아 이겨 150만원을 따냈다. 안씨를 기원에 데려왔던 이씨는 같은 시간 ‘바둑을 대신 둬서 돈을 따주겠다’고 돈을 받은 뒤 ‘노다리’로 불리는 또 다른 바둑 고수 박모씨에게 게임을 일부러 져주는 방식으로 700만원을 추가로 챙겼다.

◆“아마추어 도박 바둑 주의”

사기 행각이 교묘하게 이뤄진 탓에 피해자는 이후에도 같은 방식으로 계속 당했다. 임씨와 이씨 일당은 이 같은 방식으로 안씨를 상대로 10차례에 걸쳐 총 1억400만원을 갈취했다고 검찰은 밝혔다. 임씨 등은 또 다른 피해자 신모씨를 대상으로 같은 방식으로 1800만원을 뜯어내기도 했다. 검찰은 붙잡힌 임씨 등 3명을 제외하고 ‘똥돼지’ ‘노다리’ ‘영감’ 등 달아난 다른 일당 5~6명을 쫓고 있다.

검찰에 따르면 최근 거액의 판돈을 걸고 하는 내기 바둑 등 도박성 바둑은 지속적으로 늘고 있다. 검찰 관계자는 “아마추어 고수들 중에서 재미로 돈을 걸고 내기 바둑을 두다 도박 범죄까지 가는 경우가 꽤 있다”며 “최근 첨단 장비를 이용할 정도로 범죄가 진화하고 있어 주의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정소람 기자 ram@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