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소기업만 대상으로 하는 유럽중앙은행(ECB)의 ‘맞춤형 양적완화’가 추진되고 있다. 중소기업에 대한 대출을 담보로 은행이 발행한 자산유동화증권(ABS)을 ECB가 매입하는 방식이다.

9일 파이낸셜타임스(FT)는 ECB 소식통을 인용해 “마리오 드라기 ECB 총재가 파생상품을 통한 실물경제 활성화에 드라이브를 걸고 있다”며 이같이 보도했다. 드라기 총재는 지난 2일 통화정책회의 직후 “기업들의 자금 조달을 지원하기 위해 ABS 시장을 지원하는 등 여러 방안을 강구하고 있다”고 말한 바 있다.

ECB가 ABS 매입 카드를 만지작거리는 이유는 제 역할을 못하는 유로존(유로화 사용 17개국) 은행에 있다. 경제 전반이 침체에 빠지면서 부동산 대출 등이 부실화돼 허약해진 은행들은 중소기업 대출에 소극적이다. 이는 ECB가 공급한 유동성이 실물경제로 흘러들지 못하고 금융시장의 버블만 키우는 문제를 낳고 있다. ABS 매입은 ECB가 사실상 직접적으로 중소기업에 자금을 공급할 수 있는 길을 열어준다는 의미가 있다.

2008년 8000억유로(약 1146조원)에 달했던 유럽 내 ABS 발행잔액은 지난해 2000억유로 수준으로 쪼그라들었다. 금융파생상품이 글로벌 금융위기의 원흉으로 지목되면서 ABS 관련 규제도 높아졌기 때문이다. 이번에도 과도한 시장 팽창을 막기 위해 ABS를 통한 기업 대출 이자율을 높이거나 투자 수익률을 낮추자는 의견이 나온다.

하지만 이 같은 구상은 명목상으로나마 물가관리에 한정 짓고 있는 ECB의 역할을 뛰어넘는 것이다. 이브 메르시 룩셈부르크 중앙은행 총재 등이 “중앙은행이 기업에 사실상의 보조금을 줘서는 안 된다”며 반대하고 나선 것도 이 때문이다.

경기침체가 예상보다 길어지면 도산한 중소기업이 계속 늘면서 ECB가 사들인 ABS가 대거 부실화될 수 있다는 점도 문제다. 최악에는 서브프라임모기지에 투자했다가 도산한 리먼브러더스의 전철을 ECB가 밟을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오는 이유다.

노경목 기자 autonom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