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수첩] 청와대 기자단의 배신감
박근혜 대통령의 미국 순방 마지막 날인 지난 9일(현지시간) 새벽. 한국의 기사 마감 시간을 맞추느라 로스앤젤레스 호텔 내에 임시 마련된 프레스센터에서 밤을 새우던 청와대 기자단 사이에 ‘윤창중 대변인이 사라졌다’는 얘기가 돌기 시작했다.

전날부터 윤 대변인이 모습을 보이지 않던 차였다. 하지만 주요 행사 브리핑은 대통령을 수행한 청와대 수석들이 돌아가면서 했기 때문에, 그의 부재(不在)는 기자들의 관심을 그리 끌지 못했다.

마지막 날 새벽은 분위기가 달랐다. 윤 대변인이 하루 전 귀국을 했고, 성추행에 연루됐다는 설이 나돌았다. 이때만 해도 기자들은 설마했다. 홍보수석실도 귀국 이유에 대해 “개인적인 사유가 있어서”라고 둘러댔다. 하지만 이남기 홍보수석은 이날 오전 10시50분 프레스센터에 나타나 윤 대변인 경질 사실을 전격 발표했다. 추가 취재할 겨를도 없이 한 시간 뒤 귀국편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13시간여를 날아 서울공항에 도착한 뒤 기자들은 또 한 번 허탈감에 빠졌다. ‘윤창중 스캔들’이 주요 신문 1면 머리기사와 주요 면을 도배하다시피 다뤄진 것을 보고, 기자단 사이에선 “방미 기간 고생한 보람이 모두 허사였다”는 자조섞인 넋두리가 오고갔다.

이번 박 대통령의 4박6일 미국 순방기간 동안 기자단은 한국을 알리는 홍보요원이나 다름없었다. 한국과 시차가 정반대인 까닭에 매일 새벽 4~5시까지 기사를 마감하느라 졸린 눈을 비비면서도 한·미 정상회담 등의 성과를 보도하며 국가 위상을 드높인다는 자부심이 들곤 했다.

사건이 일어난 날 저녁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기자들이 밤새우던 그 시간, 윤 전 대변인은 새벽 호텔 로비에서 술에 취해 비틀거리고 있었다. 박 대통령과 재계 총수들의 조찬 회동이라는 중요 행사 배석을 불과 몇 시간 앞두고서였다.

귀국 후 홍보라인이 보여준 모습은 더욱 볼썽사납다. 윤 전 대변인의 조기 귀국 내막을 둘러싸고 한솥밥을 먹었던 이 수석과 윤 전 대변인이 진실공방을 벌이고 있다.

서로가 입을 타격을 최소화하기 위해 책임 떠넘기기를 하고 있는 셈인데, 어느 한쪽은 분명 거짓말을 하고 있다. 방미 성과를 어떻게 국격 향상으로 승화시킬지는 뒷전이다.

정종태 정치부 기자 jtchu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