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뉴욕에서 활동하고 있는 김보현 화백이 14일 서울 소공동 더플라자호텔에서 미술인생 75년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허문찬 기자  sweat@hankyung.com
미국 뉴욕에서 활동하고 있는 김보현 화백이 14일 서울 소공동 더플라자호텔에서 미술인생 75년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허문찬 기자 sweat@hankyung.com
여수·순천 반란사건 때는 영문도 모르고 좌익으로 몰렸다. 6·25전쟁으로 북한 인민군이 광주를 점령했을 때는 친일 반동분자로 찍혀 모진 고문을 당했다. 조선대 예술대에서 후학을 양성하던 그에게 1955년 미국 일리노이대 교환교수의 제안이 들어왔다.

굴곡진 한국 현대사를 뒤로 하고 무작정 미국으로 건너갔다. 뉴욕 맨해튼에서 건물 리모델링, 피알루미늄 공장, 이사짐센터를 전전하며 시간당 1달러를 힘겹게 벌며 매일 12시간 이상 그림을 그렸다. 2000년에는 평생을 바쳐 그린 작품 240점을 조선대에 기증했다. 뉴욕에서 활동하고 있는 96세의 최고령 재미화가 김보현 화백(미국명 포 김·사진)의 이야기다.

경남 창원 경남도립미술관에서 오는 8월21일까지 초대전을 펼치는 김 화백은 “미국으로 건너온 것이 일종의 자기망명이었지만 이제는 한국의 변화된 모습이 자랑스럽다”며 “오늘도 붓질을 하면서 살아 있다는 사실이 참으로 즐겁다”고 말했다.

1995년 예술의전당 개인전과 2007년 덕수궁미술관 회고전 이후 “작품이 한발 더 나아가면 보여주겠다”며 전시회를 미뤄온 노화백의 5년 만의 작품전이다.

경남 창녕에서 태어나 일본 태평양미술학교에서 공부한 그는 “화가는 만족한다면 죽어야 한다”면서 “마음이 아니라 머리를 쓰는 것이 문제”라고 작품 활동에 대한 식지 않은 열정을 내비쳤다.

기력이 떨어져 붓놀림은 예전처럼 정교하지 않지만 75년의 화업을 ‘신앙’으로 규정하는 그에게 그림은 ‘희망과 행복, 자유를 붓질하는 과정’이다. 오전 4시만 되면 어김없이 작업실로 올라가 하루 12시간씩 매일 그림을 그린다. 그렇게 작업실에 앉아 있어야 즐겁고 자유롭기 때문이다.

그는 “90세가 넘으면서 다시 태어나는 심정으로 새롭게 작업하고 있다”며 “영원한 현역으로 봐 달라”고 강조했다.

“그림은 제 인생 자체입니다. 살아가는 데 대충이란 있을 수 없지요. 새로운 화법과 호흡하며 젊음을 배우려고 애씁니다. 화가는 항상 젊어야 하는데 100세까지 젊은 생각을 간직할 수 있을지 걱정입니다.”

김 화백은 최근에 추상화에 다시 천착하고 있다. “요즘 선, 면, 색을 동양정신과 조합한 한국적인 추상표현주의 작업에 몰두하고 있어요. 문화재를 만든다는 기분으로 언제든 영감이 떠오르면 붓을 들고 정신없이 작업에 매달립니다.” 대학생이 된 기분으로 새로운 것을 해보자는 생각에서다.

1964년 미국 화가 실비아 왈드와 결혼해 자식 한 명 없이 타향살이를 버텨온 그는 사람 만나는 것을 싫어하고 그림을 자기 분신으로 여긴다. 한국 친구 역시 손에 꼽을 정도라고 했다.

“1940년대 말 제가 조선대에 예술과를 만들었는데 천경자 화백이 강사로 초빙됐죠. 광주 금남로에서 술마시며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하던 게 눈에 선합니다. 김환기와 남관은 서울에서 만났어요. 제가 미국에 들어가려고 여권을 만드는 동안 1년 정도 서울에서 머물렀는데 많은 도움을 받았죠. 종로 뒷골목 다방에서 차를 마셨지요.”

‘김보현과 실비아 왈드’라는 제목으로 마련한 이번 전시에는 2년 전에 세상을 떠난 부인을 추모한다는 의미에서 그의 작품을 포함해 모두 80점을 걸었다. (055)254-4600

김경갑 기자 kkk10@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