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서화 삼절(詩書畵 三絶·시서화에 모두 능한 사람)’로 추앙받는 18세기 문인화가 표암(豹菴) 강세황(1713~91). 그는 한국적인 남종문인화를 정립한 거두이지만 60년이나 무명으로 지내야 했다. 환갑 때에야 첫 벼슬에 올랐는데 그것도 최하위직인 능참봉이었다. 이후 영조의 총애를 받으며 호조참판과 병조참판을 거쳐 지금의 서울시장에 해당하는 한성부 판윤을 세 번이나 역임했다. 72세 때 청나라 건륭제 80세 생일잔치에 사신으로 다녀오며 문인화의 품격을 드높였고, 76세에도 금강산 유람 후 실경사생을 남겼다.
그를 ‘예원(藝苑)의 영수’로 키운 건 재야에서 흘린 땀과 눈물이었다. 당시 트렌드였던 진경산수화를 거부하고 남종문인화를 택한 것은 비운의 환경 때문이라고들 하지만, 궁극적으로 그를 성장시킨 건 진취적이고 실험적인 ‘열린 감성’이었다. 그는 남종화를 바탕으로 다양한 화풍을 수용했고, 그때까지 따로따로 그리던 사군자도 한 벌로 맞춰 그렸다. 서양화법을 최초로 응용한 것도 그였다.
그의 탄생 300주년에 맞춰 간송미술관이 연 ‘표암과 조선남종화파전’에 관람객이 몰린다고 한다. 오는 26일까지 계속되는 전시회에는 그의 작품 18점과 그에게 영향을 받은 김홍도, 김득신, 신윤복, 신위 등 20여명의 작품 70여점이 걸렸다. 6월25일부터 두 달간은 국립중앙박물관 특별전에서 그의 대표작인 자화상 등 40여점을 볼 수 있다.
그의 자화상을 보면, 관모를 쓰고 평복을 입은 기묘한 모습이다. ‘이름은 조정의 벼슬아치가 되어 있으되 마음은 산림(山林)에 가 있다’고 한 그의 인생이 함축돼 있다. 그러나 그의 마지막은 굴곡졌다. 맏아들이 탐관오리로 지목받아 귀양갔다가 목숨을 끊자 그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며칠 만에 생을 마감했다.
우리가 예술 속의 고통과 기쁨에 공감하며 울고 웃는 것은 인생과 닮았기 때문일 것이다. 지금도 무명과 실의의 아픔을 겪는 사람은 많다. 벼락출세로 떴다 덧없이 지는 사람도 많다. 출구가 안 보인다는 20~30대나, 일자리를 잃어가는 중년이나 모두들 괴롭다고 한다. 그러나 희망의 초상은 스스로 만들어가는 것이라는 점을 잊지 말자. 300년 전에도 그랬고 지금 또 그렇듯이.
고두현 논설위원 kd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