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칼럼] 전당포
“그것이 어째 없을까?” 가난한 문인의 아내가 옷장을 열고 모본단 저고리를 찾다가 망연자실한다. 이태 동안 돈 한푼 벌지 못한 남편은 말없이 책장을 뒤적이며 말뜻을 되새긴다. 그동안 가구 집기며 옷들을 전당포나 고물상에 맡겨 끼니를 이어왔는데 하나 남은 모본단 저고리도 아침거리를 마련하기 위해 찾았을 게 분명했다. 하지만 그건 이미 전당포에 잡혔던 걸 아내는 잊고 있다. 1921년에 나온 현진건 단편 ‘빈처(貧妻)’의 첫 장면이다.

그 당시 전당포(典當鋪)는 도시 서민들이 ‘모르는 사람’에게 급전을 융통할 수 있는 유일한 창구였다. 일제치하인 1920년대 초 서울의 조선인 18만명 가운데 전당포가 없으면 6만명 정도가 굶어죽을 만큼 서민의 삶이 고달팠다고 한다. 1920년 7월 동아일보 기사에 ‘가난한 사람에게는 전당포 한 집이 조선은행이나 한성은행 100개보다도 필요하다’는 대목이 나온다.

우리나라의 전당포는 개항과 함께 외래자본이 유입되면서 대폭 늘어났다. 1894년 이후 계속 늘어 1927년에는 조선인 799명, 일본인 606명, 외국인 1명 등 1406명이 전당업에 종사할 정도였다.

서양에서 최초의 전당포는 1428년 이탈리아의 루도비크 신부가 세웠다고 한다. 하지만 전당포 관련 언급은 고대 로마 시대부터 등장했다. 전당포(pawnshop)의 뿌리말인 전당(pawn)은 라틴어로 천(cloth)을 뜻한다. 그때도 가난한 사람들이 옷을 맡기고 급전을 빌리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라고 전문가들은 추측한다.

우리나라 최초의 전당포는 고려 공민왕 때인 1365년에 있었다고 한다. 이탈리아보다 60여년이나 앞선 셈이다. 전당포는 높은 이율 때문에 고리대금의 대명사로 여겨져 강도들의 범죄 대상이 되기도 했다. 도스토예프스키 소설 ‘죄와 벌’의 주인공 라스콜리니코프가 전당포 노파를 살해한 것도 이런 연유다.

맡긴 물건을 찾아가지 못한 경우가 더 많은 걸 보면 예나 지금이나 애달픈 사연이 그만큼이나 많았다. 그런 서민의 전당포가 줄어 1000여개만 남고 대신 비싼 정보통신기기를 취급하는 ‘IT(정보기술) 전당포’와 중고 명품을 다루는 ‘명품 전당포’가 인기를 끌고 있다고 한다. 미국에서도 부자 동네인 비벌리힐스의 전당포에 고급 보석이나 예술품을 가진 변호사, 펀드매니저, 의사 등의 발길이 이어진다니 세계적인 추세인 모양이다.

서민의 전당포가 기업형 비즈니스로 바뀌는 모습을 보면서 새삼 지난 시절을 돌아보게 된다. 그때 보릿고개를 힘겹게 넘던 모본단 저고리의 땀, 눈물겨운 가난 속에서도 끝끝내 놓치 않았던 희망의 끈….

지금은 그것들이 어째 없을까?

고두현 논설위원 kd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