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칼럼] 나 ? 경복궁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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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두현 논설위원 kdh@hankyung.com
![[천자칼럼] 나 ? 경복궁이야](https://img.hankyung.com/photo/201305/AA.7485042.1.jpg)
정종은 나를 버리고 개성으로 옮겨갔지. 다행히 태종이 돌아온 뒤 궁내에 경회루를 짓고 연못 사이로 꽃배를 띄우며 잔치를 벌였는데 참 볼 만했어. 그런데 1553년 큰불로 편전과 침전 구역의 집이 전부 타버렸고 진귀한 보배와 책 등이 소실돼버렸지. 창건 이래 최대의 참사였어. 이듬해 중건했지만 임진왜란으로 또 잿더미가 돼버렸고…. 이후 273년 동안 빈터로 남아 있던 걸 대원군이 되살렸지만 1895년 명성황후가 일본 낭인들에게 시해되고, 고종이 러시아 공관으로 파천한 뒤로는 다시 외로운 신세가 됐어.
1910년 일제에 병합된 뒤 수모는 더 컸지. 돌로 총독부 건물을 짓고 광화문을 헐어 건춘문 북쪽으로 옮겨놓는 만행까지 저질렀지. 다행히 지금의 모습으로 복원됐으니 이젠 아주 살 만해. 흔히들 중국 자금성보다 작다며 폄하하지만 내가 25년이나 먼저 태어난 걸 알면 놀랄걸. 위압적인 자금성에 비해 아담하다고 느끼는 건 건축 철학이 다르기 때문이야. 좌우대칭의 웅장함을 강조하는 그들의 설계방식과 달리 조화와 실용을 중시했지. ‘검소하나 누추하지 않고, 화려하나 사치스럽지 않게’라는 게 고래의 우리 건축 정신이었으니까.
근정전 마당에는 빗물홈이 없지만 어지간한 폭우에도 빗물이 고이지 않아. 뜰 전체를 비스듬하게 만들어 물매를 주었기 때문이지. 자세히 보면 뜰의 남쪽이 북쪽보다 약 1m쯤 낮아. 경회루와 향원정에 전등이 처음 켜지던 날도 잊지 못해. 연못 물이 빨려올라가며 우레 같은 증기발전기 소리가 났는데 잠시 뒤 휘황한 불빛이 대낮같이 점화돼 모두가 놀라움을 금치 못했지. 궁인들은 이 전등을 구경하기 위해 온갖 핑계를 대며 내전 안으로 몰려 들었고.
2010년 시민들에게 야간 개방을 시작했는데 올해는 사람들이 너무 몰려 난리군. 첫날 1만7000명에 이어 둘째날 4만명이나 와서 나도 놀랐어. 그렇기도 하지. 달빛과 조명이 어우러진 근정전의 처마가 날아갈 듯 춤을 추는 것도 이 때문일 거야. 달빛 아래 모인 사람들이 자경전 담장의 월매도 앞에서 즐거워하는 걸 보며, 618년을 살아온 내 삶도 돌아보게 돼. 저 달나라 궁궐의 선녀 항아처럼 모든 이들이 행복하고 더 풍족해졌으면 하는 기도와 함께 말이야.
고두현 논설위원 kd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