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해 11월. 중국 쓰촨성 대지진 현장에서 받은 충격을 떨치지 못해 트라우마(정신적 외상)를 안고 살던 서울 송파경찰서 이모 경감이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경찰대 졸업 이후 중국국립정치대에서 법학석사를 받아 ‘중국통’으로 인정받던 그는 2006년 중국 청두시 부영사관으로 부임했다. 중국에서 근무하던 2008년 쓰촨성에서 대지진이 발생했다. 이 경감은 동포들을 대피시키고 구호물품을 이재민에게 전달하며 처참한 현장에서 밤낮을 가리지 않고 뛰어다녔다. 여진이 지속되는 아찔한 순간에도 이 경감은 이 모든 업무를 묵묵히 수행했다. 하지만 지진의 충격은 이 경감에게 큰 스트레스로 남았다. 심장이 갑갑하고 손발이 떨리는 등의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 증상을 보이기 시작했다. 결국 그는 한국으로 돌아와 신경정신과 치료를 받았다. 치료와 요양으로 PTSD는 조금씩 호전되며 ‘쓰촨성 악몽’을 지워가던 2011년, 동일본 대지진이 발생했다. 호전되던 증상도 다시 악화되기 시작했다. 결국 그는 1년간 질병 휴직계를 냈고 강원도 속초에서 요양 중 심장마비로 생을 마감했다.

일선 경찰공무원의 PTSD가 심각한 수준에 이르고 있다. 업무 특성상 살인, 강도, 자살 등 일반인이 상상하기 힘든 충격적인 사건 현장에 지속 노출되고 있지만, 정신적 외상을 개인의 정신력 문제로 인식하는 사회 분위기 탓에 개개인이 해결해야할 사적인 영역으로 치부돼 왔다.

살해 사건현장이나 참혹한 재해현장을 찾아다니는 일선 형사들이 정신적 스트레스에 시달리고 있다. 2009년 2월 오전 경기도 화성 비병면 양노리 국도변에서 발생한 경기 서남부 연쇄살인사건 현장에서 중장비를 동원해 발굴하고 있다.  /한경DB
살해 사건현장이나 참혹한 재해현장을 찾아다니는 일선 형사들이 정신적 스트레스에 시달리고 있다. 2009년 2월 오전 경기도 화성 비병면 양노리 국도변에서 발생한 경기 서남부 연쇄살인사건 현장에서 중장비를 동원해 발굴하고 있다. /한경DB

○경찰, 트라우마 치료 나선다

경찰청이 심리치료에 관심을 보인 것은 2009년 용산참사 사건 이후 정신적인 고통을 호소하는 경찰이 늘어나면서부터다. 2010년 2개 경찰서에 한정된 심리검사는 이듬해 17개 경찰서, 지난해엔 일선 강력사건을 담당하는 1만7000명으로 확대했다. 결과는 참담했다. 10명 중 8명이 PTSD를 앓고 있었다. 이 가운데 치료가 필요한 환자 수준의 경찰만도 7000명에 가깝다는 자체 분석 결과가 나왔다. 조사과정에서도 스트레스에 노출된 경찰들이 우울증으로 자살하는 사례가 이어졌다.

결국 경찰은 경찰공무원의 정신적 스트레스 치료를 위해 외부 전문기관과 손을 잡았다. 경찰청은 서울특별시 보라매병원과 협력에 병원 내에 ‘경찰 트라우마 센터(가칭)’ 운영을 추진하고 있다. 오는 6월 중에 경찰청에서 보라매병원 측과 양해각서(MOU) 체결식을 진행할 예정이다. 경찰청이 외부전문기관과 손을 잡고 체계적으로 경찰의 트라우마 치료에 나선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일선 형사 10명 중 4명 치료 시급


[경찰팀 리포트] "악몽·우울증 호소할 곳도 없어…" 강력계 10명 중 8명이 PTSD
강한 경찰의 이미지 훼손을 각오하면서까지 경찰청이 스스로 PTSD 치료에 나선 건 방치할 경우 자칫 조직 전체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심각성을 인식했다는 방증이다. 경찰이 내부적으로 PTSD 치료에 나선 것은 2010년부터다. 당시 경찰청은 서울 성동경찰서, 서울 관악경찰서에서 근무하는 경찰들을 대상으로 4개월간 심리상담을 진행했다. 이어 2011년에는 서울, 광주, 충남 3개청 17개 관서로 상담을 확대했다. 지난해 오원춘 살인사건 현장감식에 나섰던 형사들의 충격적인 증언이 이어지면서 경찰청은 대대적인 설문조사를 진행했다.

조사 결과는 충격 그 자체였다. 지난해 경찰청이 조사한 ‘전국 경찰관 스트레스 조사’에 따르면 전체 응답자 1만7311명 중 PTSD를 겪고 있는 경찰은 82.4%(1만4271명)에 달했다. 당장 집중치료가 필요한 ‘완전 PTSD’ 대상자만도 5309명(30.6%), 심각하진 않지만 방치할 경우 악화될 수 있는 ‘부분 PTSD’ 대상자는 1569명(9.1%)이었다. 살인, 화재, 자살 등 강력사건 현장에 출동하는 경찰 10명 중 8명이 악몽을 꾸거나, 범행 현장을 제대로 지나치지 못하는 등 정상적인 업무에 지장을 받을 정도의 고통을 겪고 있다는 놀라운 결과다.

직급별로는 경장-경위-경사 순으로 현장 출동이 많은 직급이 장애로 이어지는 현상을 보였다. 직무별로도 현장에 가장 먼저 출동하는 지구대 경찰이 PTSD를 겪는 경우가 가장 빈번하게 나타났다. 이어 생활안전계-형사계-교통계 순으로 사례가 많았다.

문제는 외상증후군을 앓고 있는 경찰이 자살이라는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사례가 늘고 있다는 점이다. 대전지역 일선경찰서에 근무했던 한 형사는 사건 현장에 출동해 조사를 벌이던 중 음주운전 차량에 치여 두개골 골절 등의 부상을 입은 뒤 후유증으로 결국 목숨을 끊었다. 경찰청에 따르면 2007년부터 2011년까지 총 72건의 경찰관 자살사고가 발생했다. 자살 원인은 신병비관과 우울증이 31건으로 가장 많았다.

○경찰들은 환자 취급 우려해 ‘휴식’ 요구

전문가들은 경찰의 PTSD는 장기간 지속되며 악화되는 사례가 많아 근본적인 치료와 상담이 절실하다고 지적했다. 장정기 경찰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과장은 “경찰병원에 찾아오는 경찰관들이 꾸준히 이어지고 있고 정신과를 찾기 부담스러워하는 경찰의 특성을 감안하면 이는 빙산의 일각”이라며 “대부분 사건 발생 후 1개월이 지나도 지속되는 스트레스로 찾아오는데 이럴 경우 휴식보다는 치료가 적절하다”고 설명했다. 곽대경 동국대 경찰행정학과 교수도 “경찰관들이 쉴 수 있는 여건 마련도 중요하지만 스트레스를 단계적으로 측정해 여기에 맞는 프로그램을 적용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며 “경찰청과 병원이 협력해 체계적으로 의료전문 상담을 하면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현실은 녹록지 않다. 일선 경찰들은 집중관리가 필요한 트라우마를 치유하기 위해 치료보다 휴식을 선호하고 있다. 다른 공무원보다 정신치료 자체를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내부 시선을 의식하는 탓에 공개 치료를 꺼려하는 것이다. 과중한 업무와 인력부족으로 치료받을 시간조차 내기 힘든 열악한 근무환경도 일선 경찰의 심리상태를 악화시킨다는 지적이다.

○미국 국립PTSD센터 운영… 개인정보 보장

해외에서는 이미 경찰이 겪는 트라우마에 대한 연구가 상당 부분 진행됐다. 벵트 아르네츠 미국 미시간주 웨인주립대 교수는 2009년 스위스의 신참 경찰관 18명을 대상으로 경찰관 외상 적응 훈련을 실시했다. 우체국에 강도 출연 등의 가상 상황을 만든 뒤 훈련 대상 경찰관들에게 위험 상황에 노출되는 것을 상상케 했다. 벵트 교수는 1년 뒤 이들을 대상으로 실제 유사한 충격이 있는 가상 상황을 준 뒤 심리 및 업무수행도를 측정했다. 그 결과 훈련받은 집단은 비훈련 집단에 비해 사건현장 노출에 반응하는 신체증상이 더 긍정적이라는 결과를 얻었다.

미국, 호주 등지에서는 이를 반영해 체계적인 센터와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경우가 많다. 미국엔 국립 PTSD센터가 마련돼 있다. 이곳에선 한 번의 클릭으로 개인에게 필요한 PTSD 치료법과 전문가를 찾을 수 있다. 개인정보 등이 필요하지 않기 때문에 주위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아도 되는 장점이 있다.

호주 뉴사우스웨일스주 경찰청도 경정급 이상 경찰관에게 교육과정 수료를 의무화하고 있다. 이 지역에서는 살인·아동학대 등 잔혹한 범죄 피해를 목격한 신임 경찰관들이 정신질환으로 자살하는 사례가 빈번했다. 일본 역시 경찰지급 총기를 이용한 자살사건이 빈번하게 발생하자 경찰관 상담을 통해 이상징후가 사전에 포착되면 근무 스트레스가 적은 부서로 인사발령을 내고 있다.

경찰이 외상을 입으면 휴식을 보장하는 곳도 많다. 미국, 캐나다, 영국 등이 전체 경찰관을 상대로 주기적인 상담을 진행하고 문제가 발생하면 치료와 휴식을 법적으로 보장하고 있다.

트라우마 센터 어떻게 운영되나 지구대 경찰 우선 상담 … 진료기록은 ‘비공개’

경찰 트라우마 센터 프로젝트는 경찰청이 지난해 서울특별시 보라매병원 측에 먼저 제안했다. 자체적으로 운영해온 심리상담 프로그램으론 갈수록 심각해지는 일선 경찰들의 트라우마를 다스리기에 역부족이라는 결론을 내리고 외부 전문기관에 도움의 손길을 내민 것이다. 보라매병원 관계자는 “경찰 내부에서 진행한 심리상담은 조직 내부의 시선을 의식해 한계가 있는데 이런 부분을 극복하기 위해 병원과 협력해 센터를 개설하기로 했다”고 말했다.

트라우마 센터의 총괄은 최정석 정신건강의학과 교수가 맡는다. 최 교수는 지난해 관악소방서 등에서 소방관의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 및 자살방지 프로그램에 대한 교육을 진행하는 등 PTSD와 알코올, 도박 등 중독치료 분야 전문가로 꼽힌다.

경찰 내부에서 심리상담 요원도 파견된다. 1차적으로 경찰관의 심리상담을 진행하고 치료가 필요한 경우 바로 전문의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 경찰들이 주변의 시선을 의식해 치료를 꺼리는 것을 감안해 개인정보와 진료기록은 비공개가 원칙이다.

우선적인 상담 및 치료 대상은 지구대 및 과학수사대 경찰들이다.

살인사건, 자살사건 등 사건현장에 먼저 출동해 시체 등을 접하고 사건 현장을 분석하는 일이 많아 스트레스 지수가 높기 때문이다.

최정석 교수는 “그동안 처참한 교통사고 현장에 노출된 경찰들의 상담사례가 종종 있었다”며 “사고 이후 악몽을 꾸거나 업무에 집중하지 못하는 경찰들을 대상으로 체계적인 스트레스 관리 및 치료를 진행할 예정”이라고 설명했다.

김태호/박상익 기자 highkick@hankyung.com

■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PTSD)

post traumatic stress disorder.

한번 경험했거나 반복되는 치명적인 사건을 회상하면서 지속적으로 불안 증상을 나타내는 질환이다. 치명적 사건에는 폭력장면 목격, 친족 죽음, 성폭력 및 아동학대 등이 포함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