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위스 은행들이 미국인 고객의 계좌정보를 미 당국에 넘겨주고 거액의 벌금을 미 정부에 내야 할 처지에 놓였다. 수백년 전통의 스위스 은행의 ‘비밀주의’가 무너지고 있다.

에블린 비드머 슐룸프 스위스 재무장관은 29일(현지시간) 자국 은행들이 미국인들의 세금 회피에 개입한 의혹과 관련, 이런 내용을 골자로 미국 정부와의 합의안을 마련했다고 밝혔다. 파이낸셜타임스는 구체적인 합의안은 알려지지 않았지만 스위스 은행권이 미국에 내야 할 세금 및 벌금이 70억~100억스위스프랑(약 11조6756억원)에 이를 것이라고 보도했다.

미국은 2009년 스위스 최대은행인 UBS가 미국인의 세금 회피를 도운 혐의를 적발, 7억8000만달러의 벌금과 함께 4500개의 계좌 정보를 넘겨받았다. 이후 미 당국은 크레드스위스, 줄이어스베어 등 10여개 은행에 대해 탈세혐의를 조사하면서 계좌정보를 요구해왔다.

스위스에서 가장 오래된 프라이빗뱅킹(PB) 전문은행인 베걸린은 지난 1월 유죄를 인정하면서 5780만달러의 벌금 등을 내기로 합의했지만 충격이 워낙 커 3월에 문을 닫고 말았다. 미 재무부가 달러 결제망 차단 등 제재를 가하면 어떤 은행도 정상적인 영업을 할 수 없다.

스위스 정부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미국 측과 벌금 규모 및 사법적 처리 절차 등에 대해 협상을 벌였지만 난항을 겪어왔다.

미국의 압박이 강해지자 스위스는 결국 자국 은행들로 하여금 비밀유지법을 우회해 일부 계좌정보를 미 당국에 넘겨주고 벌금 등을 개별적으로 합의할 수 있도록 법안을 마련한 것이다.

워싱턴=장진모 특파원 ja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