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마을] 미래건축은 '노니는 삶'의 실현
자벌레는 자벌레나방의 애벌레다. 여느 애벌레와는 달리 꼬리를 머리 쪽으로 바짝 오그라지게 붙였다가 몸을 앞으로 쭉 펴서 기어 다닌다. 몸이 가늘고 긴 데다 마치 포목점 주인이 자로 옷감을 재는 듯, 손가락 뼘으로 길이를 재는 듯이 기어 다닌다고 해서 자벌레라는 이름이 붙었다. 별명도 기하학자, 측량가를 의미하는 ‘지아머터(geometer)’다.

《자벌레의 세상 보기》는 ‘자벌레처럼 기어 다니며 이 세상의 길이를 재고 그 모습을 살펴본’ 황기원 서울대 환경대학원 명예교수의 에세이집이다. 국내 도시건축 분야의 대가로 30년 넘게 서울대에 재직하며 국내 환경 디자인의 근간을 세운 저자가 건축과 환경에 관한 평생의 공부와 생각을 ‘자벌레’의 눈으로 풀어낸 글들을 모았다.

저자는 유클리드 기하학을 통해 점, 선, 면, 각도, 공간 등의 건축적 의미를 설명하는 것으로 출발한다. 이런 기하학적 무늬들이 건축과 환경 디자인의 출발점으로 우리가 터 잡고 사는 이 땅과 그 위에 선 집들과 어떻게 연결돼 있는지를 설명한다. 사람들이 땅과 맺어온 생태적·문화적인 관계에서 시작해 인간의 삶터에 알맞은 땅은 어떻게 만들어지고 그런 땅 위에 들어선 집의 형태와 기하학적 의미, 인류 문화사적 의의 등을 차례로 설명한다. 인류의 주요 거주 방식인 ‘머물며 사는 삶’과 ‘떠돌며 사는 삶’의 관계를 이야기한다.

저자는 인간의 행복이 무분별한 개발보다는 자연환경과 공존하며 살아가려는 노력에 있다고 역설한다. 그 공존은 ‘노니는 삶’에서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노니는 삶’은 “마음이 바람 따라 날아다니며 꽃길 따라 노닐면서 자연과 합일하는 경치를 즐기고 편한 신발 한 짝, 작은 돗자리 한 장, 맑은 물 한 병이면 족한” 삶이다. 미래의 건축과 환경 디자인은 이 ‘노니는 삶’을 제대로 구현하는 것이다. 저자가 추구하는 건축은 “이 세상과 자연을 칼질하고 가위질하는 게 아니라 가만히 두고 보아도 좋고 함께 노닐면 더 좋도록 다듬고 가꾸는 일”이다.

송태형 기자 toughlb@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