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에 박힌 철심도 꺾지 못한 열정…사랑의 고통 '자기애'로 극복하다
오랫동안 남편만 바라보며 살아온 화가 프리다 칼로(1907~1954)가 난생처음 외간 남자에게 마음을 빼앗겼다. 상대는 러시아에서 날아온 망명객 레온 트로츠키(1879~1940)였다. 스탈린과 공산당 노선을 놓고 대립하다 축출된 트로츠키는 이스탄불 파리 등 유럽 여러 곳을 전전했지만 스탈린의 끝없는 추적으로 어느 곳에서도 안도할 수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1937년 남편인 디에고 리베라(1886~1957)가 멕시코 대통령을 설득, 트로츠키 부부가 멕시코로 망명할 수 있게 주선했고 자신의 집을 은신처로 제공한 것이다.

트로츠키가 거처하던 당시 칼로는 남편 리베라로 인해 큰 좌절감을 겪고 있었다. 그가 리베라를 처음 만난 것은 에스쿠엘라국립예비학교 재학시절 그곳의 벽화 작업을 할 때였다. 그는 리베라에 대해 막연히 존경심을 품었지만 자신이 화가가 되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운명을 바꾼 것은 3년 뒤 일어난 끔찍한 교통사고였다. 하교 길에 트럭에 치인 칼로는 철봉이 옆구리를 관통, 허벅지로 튀어나왔고 오른쪽 다리는 으스러져 형체를 알 수 없을 만큼 중상을 입었다. 기적적으로 목숨을 건진 칼로는 오랫동안 병상에 누워 지내게 됐는데 그의 부모는 딸의 무료함을 달래주기 위해 병원 천장에 거울을 매달고 누워서 그림을 그릴 수 있도록 이젤을 설치해줬다. 그 덕분에 칼로는 자신의 모습을 차분히 관조하는 계기를 갖게 됐고 그 모습을 캔버스에 옮겨 평생 집착한 자화상을 그리는 출발점이 됐다.

몸 안 곳곳에 철심을 박는 수술을 거듭한 끝에 걸을 수 있게 된 칼로는 본격적으로 화가의 길로 나서고 리베라를 자신의 멘토로 삼는다. 리베라는 한 번도 미술교육을 받은 적 없는 이 소녀의 작품에 커다란 감명을 받았다. 게다가 매력적인 젊음이 그의 심장을 고동치게 만들었다. 그는 독재자에게 압제받고 있던 멕시코를 구하는 최선의 방책은 공산주의 사회를 실현하는 것이라고 믿으며 곳곳에 민중벽화를 제작하던 이상주의자였지만 한편으론 카사노바 뺨치는 바람둥이기도 했다. 칼로가 그를 처음 만났을 때 그는 재혼 후 두 딸을 둔 상태였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칼로와 뜨겁게 사랑을 키웠다. 1929년 8월 43세의 리베라는 22세의 칼로와 결혼식을 올린다.

그러나 행복은 오래가지 않았다. 바람기를 억누를 수 없는 리베라는 끝없이 여성들의 꽁무니를 쫓아다녔다. 칼로의 마음은 참담했다. 그렇다고 리베라의 마음이 칼로에게서 떠난 것은 아니었다. 그는 그 어느 누구보다도 칼로와 강한 정신적 유대감을 느꼈다.

리베라의 무분별한 욕망은 칼로의 여동생 크리스티나에게까지 미쳤다. 가장 가까운 두 사람에게 배신당한 칼로의 절망감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이었다. 견디다 못한 칼로는 맞바람을 피우기 시작했다. 그렇게 남편과 갈등의 골이 깊어갈 즈음 트로츠키가 그 앞에 나타난 것이다.

칼로는 이 불굴의 혁명가에게 순식간에 매료되고 말았다. 그는 리베라처럼 연애 감정에 쉽사리 자신을 맡기지 않는 절도 있는 인물이었다. 그 점이 칼로의 갈망을 더 키웠다. 칼로는 마침내 자신의 감정에 솔직해지기로 결심한다. 그는 ‘레온 트로츠키에게 바치는 자화상’을 제작, 자신의 마음을 고백한다. 그림에서 칼로는 핑크빛 머리핀과 옷으로 치장한 채 트로츠키에게 바치는 연애편지를 들고 있다.

두 사람은 짧지만 격렬한 사랑을 나눈다. 그러나 트로츠키는 사랑으로 자신의 이상이 깨지는 것을 원치 않았다. 게다가 상대는 동지의 부인이었다. 트로츠키는 6개월 만에 서둘러 거처를 옮겼다. 리베라는 자기는 마음껏 바람을 피우면서도 부인의 외도만큼은 참을 수 없었던 모양이다. 그는 1939년 이혼을 요구했고 둘은 그렇게 갈라섰다. 그때부터 철심으로 지탱된 칼로의 척추에 극심한 통증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리베라는 1년 만에 칼로의 곁으로 돌아왔다. 둘은 서로 갈라설 수 없는 정신적 동반자임을 새삼 깨달은 것이다.

이후 칼로는 고통 속에서 창작에 몰두한다. 끝없이 수술대에 올랐다. 철심 대신 그의 몸을 지탱시켜준 것은 휠체어와 진통제였다. 그러나 칼로는 굴하지 않았다. 아픈 몸을 이끌고 반전운동에도 적극 참여했다. 리베라는 그런 칼로의 모습을 ‘전쟁의 악몽과 평화의 꿈’에 담아 영원히 기념했다.

1954년 7월 칼로는 일기장 마지막 페이지에 ‘이 외출이 행복하기를, 그리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기를…’이라는 회한 어린 문구를 남긴 채 숨을 거뒀다.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그를 지탱해준 것은 자화상이었다. 고통스러운 육신, 외로움에 전 마음을 의연하게 이겨내는 화폭 속의 자신이 그를 보듬어 줬다. 세상에 자기에 대한 사랑만큼 강한 것은 없다고 그의 그림은 우리를 향해 소리 없이 외친다.

정석범 문화전문기자 sukbumj@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