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일본형 장기침체' 예방하려면
한국의 성장률을 20년 전의 일본 성장률과 같이 그려보면 놀랄 정도로 비슷하다. 일본은 1970년대, 한국은 1990년대부터 성장률이 빠르게 떨어지기 시작해 10%에 달하던 성장률이 20년 만에 4~5%대로 절반 가까이 낮아진다. 일본이 1990년대부터 제로 성장기에 진입했듯이 2010년대 한국도 같은 경로를 따르지 않을까 하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일본 장기침체의 직접적인 원인으로 부동산 버블 붕괴의 후유증, 디플레이션 악순환 등이 지적된다. 1990년대에는 부동산 가격의 급격한 하락으로 수요가 위축되고, 부동산에 투자했던 기업들의 부실이 커지면서 신용창출이 정상적으로 이뤄지지 못했다. 2000년대에는 물가상승률이 마이너스를 기록하면서 가계와 기업이 소비와 투자를 미루고 이에 따라 물가하락 압력이 더 커지는 악순환이 발생했다.

보다 근본적으로 일본 경제의 성장능력을 떨어뜨린 것은 장기간 지속된 엔고, 내수부진의 만성화, 고령화에 따른 노동력 감소, 위기에 대한 정부 대책의 실패라고 생각된다. 1985년 플라자합의 이후 빠르게 진행된 엔고로 일본의 세계 수출시장 점유율은 급격히 추락했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 기업들이 생산기지를 해외로 이전하면서 일본 내 투자나 생산이 위축되는 공동화 현상이 발생했다. 80년대 후반에는 부동산 붐에 의지해 어떻게든 성장을 유지할 수 있었지만 부동산 거품이 붕괴되면서 급격한 쇠퇴를 맞게 된 것이다. 위기에 따른 불안심리로 고령층을 중심으로 소비성향이 낮아지면서 만성적인 내수부진으로 이어졌다. 생산가능인구가 감소하고 근로시간도 단축되면서 노동투입이 줄어든 점도 일본의 잠재성장률을 떨어뜨렸다.

일본 정부의 잘못된 위기대응도 사태를 악화시켰다. 금융 구조조정을 적기에 시행하지 못해 부실한 기업에 자금 지원이 계속됐으며, 물가가 계속 하락하는 상황에서도 통화 확대에 소극적 태도를 보여 디플레를 장기화시켰다. 장기성장률 저하를 인식하지 못하고 건설투자 확대 등 무리한 부양책을 쓰다가 재정적자와 국가부채가 누적되는 결과를 초래한 바 있다.

이와 같은 일본의 경제상황은 한국의 현재 모습과 여러 측면에서 비슷하다. 우리나라의 고령화 속도는 일본보다 가파르며, 세계적으로 긴 근로시간도 빠르게 단축되고 있다. 고령층의 노후불안에 따른 소비성향 저하, 경제규모에 비해 과도한 건설투자 조정으로 내수부진이 수년째 고착되는 모습이다. 엔저와 원화절상으로 수출의 가격경쟁력도 위협받고 있다.

장기침체를 피하기 위해서는 일본의 실패 사례에서 배워야 한다. 우선 원화가 빠르게 절상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 단기적으로 자본 유출입에 대한 규제를 강화할 필요가 있지만 보다 근본적인 해결책은 내수를 늘리고 수입의 폐쇄성을 줄여 수출과 수입이 같이 늘어나도록 하는 것이다. 여가문화, 관광, 의료보건 등 그동안 우리 국민이 충분히 소비하지 못한 부문에서 과감한 규제 완화와 인프라 구축을 통해 생산확대와 고용창출의 선순환을 만들어야 한다. 수요부진이 장기화되는 시기에는 디플레이션에 대한 경계도 강화할 필요가 있다. 금리정책을 신축적으로 가져가고 필요하다면 인플레이션 목표치도 탄력적으로 수정해야 한다.

노동의 양적 투입 감소는 불가피하지만 질적 측면에서의 손실은 최소화해야 한다. 일본에서는 버블붕괴 이후 청년 고실업 지속으로 청년층의 숙련도와 근로의지가 떨어지면서 인적자본이 손상됐고 이것이 잠재성장률 하락으로 이어졌다는 분석도 있다. 다른 연령층에 비해 청년층의 취업 충격이 훨씬 크게 나타나는 현재의 상황은 바람직하지 않다.

단기적인 정책성과에 연연하지 않는 자세도 중요하다. 재정확대나 부동산 경기 활성화 정책은 경기의 심각한 위축 시기에 한시적으로 이뤄져야 한다. 기초과학기술 부문의 인프라 확대, 민간의 창의력이 극대화될 수 있는 유연한 시스템 구축 등 중장기 성장 잠재력을 높이는 데 힘을 집중해야 한다.

이근태 <LG경제연구원 수석연구위원 gtlee@lgeri.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