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수첩] 자본시장 왜곡하는 '경제민주화'
한국 자본시장에서도 ‘을(乙)의 반란’이 일어났다. 상장지수펀드(ETF) 시장의 ‘슈퍼갑(甲)’으로 꼽히는 한국거래소에 반기를 든 대형 자산운용회사들이 주인공이다. 대형 자산운용사들은 거래소 이사장 면담 요청, 금융투자협회를 통한 의견 개진 등으로 거래소를 압박하고 나섰다. ‘쥐도 궁지에 몰리면 고양이를 문다’는 말에 비슷하게 들어맞는 일이다.

무엇이 ‘을’들을 움직이게 했을까. 한국 사회를 배회하고 있는 ‘경제민주화’란 명분이 자본시장에 상륙한 게 그 발단이다.

자본시장의 파트너를 자처하는 한국거래소는 지난달 20일 ‘시장 지배적 상장 주선인의 ETF 상장 심사를 강화해 업계의 균형 성장을 유도한다’는, 자본시장과 한참 거리가 있어 보이는 ETF 상장심사지침을 만들었다.

심사 지침은 한마디로 대형 운용사들의 상품 상장을 쉽지 않게 하겠다는 의도라는 게 업계의 주장이다. 신상품 출시 경쟁이 치열한 ETF 시장에서 상장심사가 늦어지면 자산운용사들은 손해를 보게 돼 있다. 삼성자산운용, 한국투자신탁운용, 미래에셋자산운용 등 ‘시장 지배적 상장주선인’으로 지목된 대형 자산운용사들은 부글부글 끓을 수밖에 없다.

거래소의 ETF 상장심사지침이 투자자들에게 이익이 될지도 의문이다. 아무래도 ETF 운용·개발 역량이 축적된 대형 자산운용사들의 ETF 상장은 위축될 수밖에 없다. 투자자들은 ‘KODEX’(삼성자산운용) ‘TIGER’(미래에셋자산운용) ‘KINDEX’(한국투자신탁운용) 브랜드의 특정 ETF를 매수하고 싶은데, 할 수 없이 다른 자산운용사의 ETF를 사야 하는 어처구니 없는 상황이 생길 수도 있다. ‘상품 선택의 자유’가 제한되는 일이 나오지 말라는 법도 없다.

거래소는 투자자 보호와 균형 성장을 내세우며 대형 자산운용사들의 시장 점유율 확대를 경계하고 있다. 그런데 거래소가 말하는 ‘시장지배적 상장주선인’들의 점유율 합계가 70%를 넘어선 지 몇년이 지났어도 한국 ETF 시장은 수수료가 싸지고 다양한 상품이 상장되고 있다.

대형사의 일방적 독주는 물론 막아야 한다. 그렇다고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유례를 찾을 수 없는 ‘반(反)시장적’ 규제의 잣대를 들이대선 곤란하다.

황정수 증권부 기자 hj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