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칼럼] '까칠봉'
피아 간의 참호 거리는 20~30m밖에 안 됐다. 너무나 근접한 전선이어서 포병이나 항공기의 지원도 받을 수 없었다. 오로지 보병의 근접 전투에 의존해야 했다. 나중엔 병사들이 너무 지쳐서 방아쇠 당길 힘도 없을 정도였다. 그러나 전방에 1122고지(일명 김일성고지)가 있는 전략요충지였기에 어떤 희생을 감수하고라도 이겨야 했다. 낮에 백병전으로 어렵게 점령한 고지를 밤에 빼앗기기를 여섯 번이나 반복했다.

동부전선의 가칠봉 전투는 1951년 9월4일부터 10월14일까지 40일 동안 계속됐다. 고지 하나를 두고 국군 제5사단과 북한군 제27사단이 맞붙은 이 격전에서 국군은 북한군 1102명을 사살하고 250명을 포로로 잡았다. 우리 측 피해도 커서 692명이 죽고 437명이 실종됐다. 부상자는 4251명에 달했다. 그러나 이 전투에서 승리함으로써 북한군을 쌍두령 쪽으로 밀어내고 펀치볼 북서쪽의 주요 고지를 확보할 수 있었다.

가칠봉은 강원도 양구군 해안면에 있는 산이다. 금강산의 마지막 봉우리로 이 곳을 더해야 1만2000봉이 된다는 뜻에서 ‘더할 가(加)’를 썼다고 한다. 그만큼 아름다운 산에서 피의 격전이 수없이 벌어졌으니 역사의 비극이 아닐 수 없다. 비무장지대에 있는 이 산의 바로 아래에 북한이 판 제4땅굴이 있다. 주봉의 능선은 군사분계선을 넘어 북쪽의 금강산으로 이어진다. 표기법으로는 가칠봉이지만 양구 사람들은 된소리를 섞어 까칠봉이라고 부른다.

그저께 김정은이 북측 최전방인 ‘까칠봉 초소’와 ‘오성산 초소’를 찾았다고 북한 매체들이 요란하게 전했다. 지휘관들의 만류를 뿌리치고 우리 군 최전방 경계초소로부터 약 350m 떨어진 초소에 들렀다는 점을 유독 강조했다. 아마도 대담한 리더십을 대내외에 과시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다만 350m는 북측이 과장한 것 같다. 국방부에 확인해봤더니 우리 군 초소와는 750m 떨어진 곳이라고 한다.

아무튼 까칠봉과 함께 오성산 일대는 6·25전쟁 당시 중동부전선에서 가장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던 곳이다. 김일성이 ‘남조선군 장교의 군번줄 한 트럭을 준다 해도 바꾸지 않겠다’고 했던 요충지였다. 이 ‘피의 능선’에서 희생된 무명용사들이 많은 것도 이 때문이다.

‘비목’의 작사자인 한명희 씨(전 국립국악원장)도 이 일대에서 ROTC 육군 소위로 복무했다. 김일성고지와 오성산이 마주 보이는 백암계곡에서 이름없는 무덤을 발견한 그는 비애에 젖어 노랫말을 썼다고 한다. 그 ‘초연이 쓸고 간 깊은 계곡 양지녘’이 바로 이곳이고, 궁노루 울음 소리 산을 울릴 때 ‘홀로선 적막감에 울어지친 비목’이 섰던 자리도 바로 이곳이라니….

고두현 논설위원 kd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