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동헌 기자 dhchung@hankyung.com
정동헌 기자 dhchung@hankyung.com
“운동회나 놀이동산에 같이 간 적이 없어요. 집 잡히고 빌린 돈으로 원단을 떼서 옷을 만들었지만 정작 청이가 무슨 옷을 입고 다니는지는 몰랐죠.”

한국을 대표하는 디자이너 가운데 한 명인 이상봉 ‘이상봉컬렉션’ 대표는 아들 청청씨(34)만 생각하면 마음이 짠해진다고 했다. 그는 일요일에만 간신히 얼굴을 볼 수 있는 아버지였기 때문이다. 이 대표는 “아들이 어느새 다 자라 어릴 적 함께 못한 시간을 되찾으려는 듯 파트너가 돼 매일 곁을 지키고 있다”며 자랑스러워했다.

이청청 씨는 2010년 영국 센트럴세인트마틴스예술대 아트디자인과를 졸업한 뒤 이상봉컬렉션에서 디자인팀장을 맡았다. 이 대표는 “아들이라고 봐주는 것 없이 더 혹독하게 가르친다”고 말했지만 이 팀장이 올초 브랜드 ‘라이(LIE)’를 만들 수 있도록 지원한 것을 보면 어쩔 수 없는 아버지인 것 같다.

성격과 취미가 완전히 다르고, 이 팀장이 어릴 때는 거의 대화가 없었다는 이씨 부자는 지금 디자이너의 길을 함께 걷고 있다. 직업인으로서 ‘동지’가 된 아버지와 아들은 서로에 대해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지난달 26일 약속 장소인 서울 삼성동의 스페인 음식점 ‘부엔까미노’에 나타난 이씨 부자는 똑같이 선글라스를 쓰고 있었다. “나이는 묻지도 말고 쓰지도 말라”는 이 대표의 말이 떨어지자 이 팀장은 그 마음을 안다는 듯 크게 웃는다. 다른 듯 닮은 이들과의 인터뷰는 세 시간 넘게 이어졌다.

○‘2세 디자이너’로 살아가는 법


[한경과 맛있는 만남] 디자이너 이상봉·이청청 父子 "수많은 옷 디자인 했는데 아들에겐 옷 한 벌 못 만들어줘"
이 대표는 “1주일에 한 번 이 식당을 찾는다”고 했다. 먼저 나온 로메인상추 샐러드에 대해 그는 “치즈와 블랙 올리브가 곁들여져 입맛을 돋운다”며 손가락을 치켜세웠다.

이 팀장에게 궁금한 걸 먼저 물었다. ‘디자이너지만 옷 한 벌 안 만들어주는 아버지’였는데, 서운하지는 않았는지. 그런 아버지의 직업을 따라 한 건 무슨 까닭인지….

“디자이너가 된 계기를 꼽자면 초등학교 시절 아버지 패션쇼를 구경하면서부터라고 할 수 있겠네요. ‘왜 아버지가 이렇게 바쁠까’ 늘 궁금했는데, 쇼장에서 저도 어떤 희열을 느꼈거든요. ‘아, 이래서 디자이너를 하는구나’라고 생각했어요.”

이 팀장에겐 ‘이상봉의 아들’이란 타이틀이 늘 따라붙는다. 주변의 기대감이 크다는 얘기다. 이상봉컬렉션이라는 큰 작업실에서 디자이너 일을 배우는 혜택도 누렸다. “다른 디자이너 선·후배보다 많은 혜택을 받고 있는 걸 잘 알아요. 그래서 늘 감사한 마음이고요. 그러나 너무 많은 기대를 받고 있다는 것은 부담이죠. 아버지 말씀대로 ‘정석대로, 마지막까지’ 가다보면 ‘디자이너 이청청’을 알아봐주겠죠.”

치즈를 얹은 아스파라거스와 관자 구이 접시에 손을 뻗던 이 대표가 이 대목에서 끼어들었다. 그는 “디자이너를 포함해 유명 예술가의 2세 중에 실패하는 사람이 성공하는 사람보다 훨씬 많다”며 “‘부모를 뛰어넘는 뭔가 새로운 걸 보여줘야 한다’는 강박감이 오히려 사람을 망치는 경우가 많다”고 안타까워했다. 이 대표는 “배우 하정우 씨가 좋은 평가를 받는 것도 아버지(배우 김용건 씨)의 존재와 상관없이 자신만의 연기를 보여주기 때문 아니겠느냐”고 했다.

방금 전까지 안쓰러운 눈으로 아들을 바라보던 아버지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어졌다. 자신의 일 앞에 타협이란 없는 ‘디자이너 이상봉’의 모습이었다.

○자유로운 아버지, 올곧은 아들

이 팀장은 “디자이너로서 이상봉은 어떤 수식어도 필요 없는, 존경하는 인물”이라고 말했다. 아들의 얘기를 가만히 듣던 이 대표는 먹물을 입힌 모차렐라치즈 튀김을 집으며 연방 머쓱해 했다. 그는 “어릴 적엔 대화도 거의 안 했는데, 요즘 들어 인터뷰 같은 이런 자리에서 아들의 속마음을 듣게 됐다”며 웃었다.

인터뷰 중간 사진기자의 플래시가 터지자 아버지는 자연스럽게 포즈를 취했다. 저명인사다운 ‘포스’였다. 반면 아직 인터뷰가 어색한 30대 아들은 모범생같이 경직된 자세였다. 이 대표는 “더 환하게 웃으면서 내 어깨에 손을 올려봐”라며 아들의 사진 포즈까지 일일이 챙겼다. 이 대표가 ‘자유로운 영혼’을 떠올리게 한다면, 이 팀장은 ‘흰색 도화지’ 같은 느낌이었다.

“디자이너라면 아름다운 소설처럼 뱀의 유혹에도 빠져보고, 또 아파하기도 해야 창의적인 작품을 만들 수 있는 거예요. 청이는 교과서처럼 너무 올바르고 곧아요. 그래서 걱정이죠.” 아버지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아들이 입을 뗐다. “아버지, 제 이름이 맑을 청(淸)에 푸를 청(靑)이에요. 맑고 푸르게 자라라고 직접 지어주셔놓고 이제 와서 ‘뱀의 유혹에도 빠져보라’고 하면 어떡합니까.”

한바탕 웃음이 번져가는데 올리브 오일로 맛깔나게 만든 봉골레 파스타와 토마토소스 해산물 파스타가 나왔다. 두 부자는 맛있게 먹으며 금세 비워냈다. 부자간에 닮은 점이 많은지 궁금했다. 이 대표는 “성격부터 밤문화까지 다 다르다”고 했다. “1주일에 나흘은 이태원에서 술을 마시는데, 제 술친구 중엔 청이보다 어린 친구들도 많거든요.” 역시 이 대표는 ‘자유로운 영혼’이었다. 이 스페인 음식점도 다양한 직업과 연령층의 친구들과 자주 찾는 곳이라고 했다.

이 팀장은 “예전에 아버지는 맥주 한두 병밖에 못 드셨는데, 나이 들수록 주량이 점점 늘고 있다”며 “술자리에 같이 가보면 20대부터 60~70대까지 정말 다양한 분들이 계셔서 놀랄 때가 많다”고 했다. 이 팀장 자신은 소주 한 병 반 정도는 마신다고 했다.

○6년 전 수술 뒤 ‘덤으로 얻은 인생’


“다음엔 저녁 때 만나자”는 얘기를 나눌 무렵, 스페인 요리를 대표하는 해산물 파에야(볶음밥의 일종)가 나왔다. 노란 쌀알과 큼지막한 새우, 홍합, 조개, 오징어가 먹음직스러웠다. 이럴 때 ‘돌직구’를 날려야겠다 싶어 “그런데 왜 나이를 밝히지 않으세요?”라고 이 대표에게 물었다. 그는 “37세 때 연극하는 후배들이 ‘형도 나이 들어가는 것 같아’라고 말하는 걸 듣고 큰 충격을 받았어요. 디자이너로서 재능이 있는지 없는지 몰라 힘들어하고 있는데, 나이까지 들어간다고 하니까 무섭더라고요. 그 뒤론 나이를 세지 않고 무조건 서른일곱 살이라고 말하죠. 요즘 몇몇 친구들이 ‘우리 내일모레 환갑’이라는 말을 하면 전 깜짝 놀라서 ‘너 그렇게 늙었어?’라고 한다니까요.”(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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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패션쇼 테마는 아리랑 … 큰 무대 함께 만들것”

가만히 듣고 있던 이 팀장은 “나이를 잊고 사는 건 좋지만 건강을 챙겨야 하는데, 운동을 안 하셔서 걱정”이라고 했다. 이 대표는 조용히 숟가락을 내려놓으며 6년 전 이야기를 꺼냈다. “정기 건강검진을 했는데 몸 속에 종양 같은 게 발견됐어요. 의사가 ‘죽을 확률이 50%’라고 해서 미국에 있는 딸(이나나 씨) 결혼식에도 못 갔거든요. 하루에 1㎏씩 빠지고 매일 악몽을 꾸고, 준비 중이던 패션쇼도 다 접었죠. ‘내가 죽으면 몇 명이나 찾아올까’ 하는 생각까지 들더군요. 모든 신과 조상님까지 찾으면서 ‘아무 문제 없게 해주세요. 그러면 남은 인생은 ‘보너스’로 생각하고 사회에 기여하면서 살게요’라고 기도했죠.”

인생의 전환점이었다. 다행히 건강을 회복한 이 대표는 그 뒤로 중·고교생은 물론 초등학생에게까지 ‘멘토’ 역할을 해주고 있다. “디자이너의 꿈을 꾸는 학생들의 이메일에 시간 날 때마다 답해주고, 어린이신문에 기고하거나 멘토링 행사에 강연을 가는 등 할 수 있는 일은 열심히 하고 있다”는 설명이다.

○다음 패션쇼는 ‘아리랑’ 테마로


식사가 끝난 뒤 시원한 커피를 주문했다. 요즘 내년 봄·여름 패션쇼 준비로 한창 바쁠 때인데 인터뷰에 응해줘서 고맙다는 인사를 건네자, 이 대표는 “아리랑을 접목시킨 옷을 청이와 함께 만들고 있다”며 “화선지에 무궁화 꽃으로 형상화한 음표를 붓으로 그려넣는 등 다양한 방법을 시도하고 있다”고 했다. “오는 10일 오스트리아에서 열리는 한·오스트리아 수교 50주년 기념 패션쇼도 청이와 같이 멋지게 꾸밀 겁니다.” 역시 한국을 대표하는 디자이너다웠다.

마지막으로 부자 디자이너에게 꿈을 물었다. 이 대표는 “100년 뒤에도 이상봉이라는 브랜드가 남아 있었으면 좋겠고요, 매장 안에 한글 옷이 걸려 있길 소망해요”라고 했다. “아버지와 큰 무대를 같이 만들어보고 싶어요. 또 ‘이상봉 디자이너의 아들’이 아니라 ‘이청청 디자이너’로 자리매김해야죠.

” 이 팀장이 답했다. 작업실까지 걸어가면서 아버지는 또 일 얘기만 할 것이라는 이 팀장의 표정은 오후 햇살처럼 환했다.

[한경과 맛있는 만남] 디자이너 이상봉·이청청 父子 "수많은 옷 디자인 했는데 아들에겐 옷 한 벌 못 만들어줘"

이상봉 디자이너의 단골집 부엔까미노 샤프란 파에야에 전채요리 다양

[한경과 맛있는 만남] 디자이너 이상봉·이청청 父子 "수많은 옷 디자인 했는데 아들에겐 옷 한 벌 못 만들어줘"
서울 삼성동의 스페인 음식점 ‘부엔까미노’는 안락한 분위기에서 입맛을 돋우는 퓨전 요리를 먹을 수 있는 곳이다. 사적 199호로 지정된 선릉 바로 옆에 있어 창문을 열면 숲 속 공기가 스며든다. 주요 메뉴는 해산물과 아스파라거스를 넣은 샤프란 파에야(2만1000원), 닭고기와 숙주를 넣은 데리야키소스 볶음 쌀국수(1만7000원)다. 다양한 타파스(tapas·전채요리)를 골라먹는 재미가 쏠쏠하다. 치즈를 얹은 아스파라거스 구이(6000원), 타르타르소스를 얹은 오징어·새우 튀김(6500원), 한우등심스테이크와 부추샐러드(1만1000원), 오렌지와 레몬에 절인 모둠 올리브(5500원), 버섯을 넣은 루콜라 샐러드(6000원) 등은 식사는 물론 안주로도 손색이 없다.

오전 11시30분부터 오후 1시30분까지는 오늘의 브런치(9500원), 오늘의 수프와 토스트(7000원), 햄버그스테이크(9500원), 쌀국수면을 넣은 얼큰한 해산물 토마토 수프(9500원) 등의 런치 메뉴를 즐길 수 있다. (02)3453-9726

민지혜/임현우 기자 spop@hankyung.com